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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펌글]좋은글 모음

소설가 이 외수의 신혼이야기

by 칠칠너래 2005. 10. 3.

이외수의 생일은 음력 8월 15일 양력으로는 추석날이다. 이름은 외가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바깥 외(外)자로 지었고 거기에 항렬을 따져서 빼어날 수(秀)자를 붙였다. 그의 어머니는 이외수가 세 살 때 타계해서 어린 이외수는 할머니 손에 의해 길러졌다.

거기에다 설상가상으로 아버지가 6.25전쟁에 참전하는 바람에 할머니가 집안의 생계를 도맡아야 했다. 당시는 전쟁통이라 너나없이 어려웠겠지만 집안의 기둥인 아버지마저 없었던 이외수네는 더욱 어려웠던 모양이다.

어쨌든 초등학교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어릴 때부터 싹이 보이고 영리했던지 글짓기나 그림 그리기 등등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고 그의 부친은 회상한다.
아버지가 군 제대 후에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던 관계로 아버지의 직장을 따라 강원도로 흘러들어 온 이외수는 교육대학을 다니다 말고 전교생이라곤 17명뿐인 '객골 분교'의 소사 노릇을 했다.


1. 도를 닦듯 굶으며

'이 선생님'의 꿈을 안고 교육대학에 입학했던 놈이 결국은 '이씨'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
그 겨울은 얼마나 외로웠던가. 방학이 되자 텅 빈 학교를 지키며 소설가가 되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고 쌀이 생기면 밥을 한 솥 가득해 놓고 조금씩 먹었다.

눈이 내리는 첩첩 산중. 가끔, 쌓였던 눈이 골짜기로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천둥처럼 들리곤 했다.
글을 쓴다고는 했지만 수많은 파지만 뜯겨져 나갔을 뿐이다. 그리고 나는 그곳을 내려와야 했다. 비공식적으로 취직한 곳이었기에 소사의 자격마저 박탈당한 것이었다.

수입이 없었던 나는 다시 도를 닦듯 굶기 시작했다. 지금도 나는 곧잘 굶는데 아마도 그때의 경험 탓이리라.
춘천으로 돌아온 나는 좀더 구체적인 거지가 되었다. 춘천의 명동거리 한복판에 서서 아는 사람을 만나면 돈을 꾸어서 입에 풀칠을 했다. 도무지 살아 있는 게 혐오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던 때도 있었다.
어쩌다가 운 좋게도 술이 생기면 밤 안개가 흐르듯이 시내를 떠돌아 다녔다.

잠은 주로 다리 밑이나 벽돌 공장 신세를 지곤 했다. 그 즈음, 머리에 이가 생겼는데 산으로 올라가 양지바른 비탈에 주저앉아서 이를 잡는 것으로 낙을 대신하기도 했다.

2. 미스 강원과의 극적인 인연.

춘천의 한복판엔 전원 다실이라는 다방이 있었다. 그 다방 주인은 고맙게도 내 전용의자 하나를 구석진 자리에 만들어 주었다. 나는 그 의자에서 잠을 잤으며 편지를 쓰기도 하고 담배를 구걸하기도 했다. 그 의자는 바로 내 침실이자 서재이며 사무실이었던 셈이다.

그날도 나는 내 전용의자에 앉아서 개떡같은 내 청춘, 개떡같은 나의 장래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곤 부시시 일어났다. 어디 가서 곧 갚겠다고 거짓말을 해서라도 술값을 꿔 한잔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 때였다. 갑자기 다방 안이 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지금 막 문을 열고 들어서는 한 여자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첫눈에도 황홀함을 느낄 정도로 기막힌 미인이었다. 다방안의 모든 시선들이 그녀에게로 쏠렸다. 그녀는 내 전용의자 가까이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애인이 있을까. 춘천 사는 여자일까. 몇 살이나 되었을까. 호기심의 도를 넘어 궁금증이 꼬리를 물었다.
그리고 나는 순간적으로 어떤 운명을 예감했다. 따라서 가슴은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크라테슨가 말크라테슨가가 한 말이 생각났다.
'너 자신을 알라.'

나는 내 꼬라지를 돌아보았다. 더 이상 설명을 덧붙일 필요도 없는 거지 꼴 그 자체였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나도 엄연한 사내라는 사실이다.

나는 일어서서 천천히 그녀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의 의자 팔걸이에 걸터앉은 다음 이렇게 말했다.
"아가씨, 참 예쁜데요. 아니, 아름다운데요. 앞으로 이 다방에 자주 좀 나와주쇼. 내가 한번 아가씨를 꼬셔 볼 생각이니까."

그러나 그녀는 나를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도도한 표정으로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그녀의 어깨까지 두어 번 가볍게 두드려 주고는 다방을 나와 버렸다. 바깥으로 나오니 무슨 일인가 일어나 주고야 말 것 같은 기분이 왠지 들었다.
그렇게 봄날은 가고 있었다.

며칠이 지났건만 기다리던 그녀는 좀체 나타나 주질 않았다. 그런 어느 날, 외출했다 돌아와 보니 거짓말처럼 그녀가 아름다운 자세로 혼자 앉아 있었다. 너무나 감격해서 숨이 턱 멎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그녀에게 곧장 다가갔다. 그리고 침착하고 느린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아가씨, 예언컨데 분명히 아가씨는 나를 좋아하지 않고는 못 배길 겁니다. 이왕 좋아할 거면 미리미리 좀 좋아해 주쇼."
그러나 그녀는 뉘 집 개가 짖느냐는 식이었다.

며칠이 지났다. 나는 강원일보에서 중편소설 하나를 연재해 달라는 청탁을 받고 예의 그 서재에서 되지도 않는 글을 비벼 쓰느라 땀 깨나 흘리고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말을 던졌다.
"이것 보세요!!"
소리나는 곳에는 놀랍게도 그녀가 친구와 함께 내 가까이에 앉아 있었다.
"괜히 예술가인척 하지 말아요. 혐오감을 주니까. 그만 이 다방을 나가 주실 수 없으세요?"
깔보는 듯한 말투였다. 하지만 나는 허리를 구부리고 묵묵히 원고지 칸을 매꾸어 나갔다. 괘씸했지만 글을 다 쓸 동안은 대답을 해 주지 않기로 한 것이다. 글을 다 쓰고 나자 같이 왔던 친구는 보이지 않고 그녀 혼자 앉아 있었다.

"이봐요. 엉터리 소설가님. 배고픈데 저녁 좀 사 주실 수 없으세요?"
그녀의 놀리는 듯한 어투에는, 거지꼴을 한 네까짓 게 저녁을 살 수 있겠느냐는 조롱이 섞여 있는 것 같았다.
"정말 제가 사드리면 먹을 자신 있어요?"
짐짓 내가 난처한 표정으로 말하자 그녀는 빈 털털이 거지같이 생긴 사람이 결코 살수 없으리라는 확신을 하듯 예의 그 놀리는 투로 말했다.
"사달라니까요."
그러면서 그녀는 남자가 뭐 그리 시시하냐는 둥 하며 재차 채근해 왔다. 나는 그녀를 단골 분식집으로 데려갔다. 그리고는 가락국수를 시켰다. 그녀는 정말 배가 고팠던 것일까. 아니면 나의 가난에 어떤 감동을 받은 것일까. 얌전만 뺄 줄 알았던 그녀가 묵묵히 가락국수 한 그릇을 모두 건져 먹었던 것이다. 나는 식당 문을 나서며 기분 좋게 소리쳤다.
"아줌마 외상!"
내가 외상의 천재라는 것을 그녀는 몰랐을 거다.
그리하여 우리는 통성명을 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나를 대하는 그녀는 '이 녀석은 재미있는 놈이다.'라는 정도로만 평가하고 있는 눈치였다.

그 즈음 그녀는 다소 권태롭고 짜증스런 생활을 하고 있는 듯이 보였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간호원이었고 병원 근무를 집어치운 채 일본을 갈까 독일을 갈까 망설이고 있는 중이었다.

그 후에도 가끔 그녀는 전원 다방에 나타나서 영화구경 좀 시켜 주실래요? 짜장면 좀 사 주실래요? 하며 불쑥불쑥 내 텅 빈 호주머니를 넘보곤 했다. 그때까지도 나는 한낱 그녀의 심심풀이 땅콩에 불과했던 것 같았다.

3. 그녀의 집에 초대되다.

그런 어느 날, 강원일보에서 삽화를 그리고 있었는데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다. 집에서 모내기를 하는데 밥을 먹으러 오라는 것이었다. 너무나 기분 좋은 그녀의 제의에 즉시 가겠노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일이 꼬이느라고 그랬는지 그녀의 전화가 끝나자마자 급한 일거리들이 밀어닥치기 시작했다. 부랴부랴 그 일들을 해치웠지만 이미 약속 시간은 한시간이나 지나 있었다.

그녀에게 미리 연락을 취해야 했었지만 전화번호도 모르는 상태였다. 결국 나는 그녀의 집에 초대되어 식사대접을 받는 영광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홧김에 외상 술을 퍼 마셨다. 약간 취한 김에 생각하니 밑지는 셈치고 한번 가보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버스를 탔다. 그 때는 이미 약속시간에서 두 시간 반이나 지났기에 그녀가 아직까지 만나기로 한 장소에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치 않았다.

그러나, 감격스러워라. 내가 버스에 내렸을 때 그녀는 어느 건물 담벼락에 웅크리고 앉아 풀죽은 모습으로 그때까지 뙤약볕 아래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모습은 지금까지 내가 보아 온 그녀의 모습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그녀에게 말을 더듬거리며 늦어버린 이유를 장황하게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녀는 한참동안 더위에 지친 모습으로 내 변명을 묵묵히 듣고 있었다. 그러다가 불시에 반짝 웃으며 "괜찮아요."라고 간단하게 말해 버렸다.

그녀의 집은 시골집이었다. 집안 사람들 모두는 모내기를 나갔는지 텅 비어 있었다.
그녀는 나를 사랑방에 앉혀 놓고 새로 밥을 짓기 시작했다. 한참 후, 그녀가 내게 와서 불쑥 말했다.
"옷을 벗으세요."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옷을 벗으라니... 옷을 벗으라니.... 도대체 이 여자의 정체는 무엇이냐. 당황한 나는 순간적으로 해괴한 상상들을 떠 올렸다.
"지금부터 내가 시키는 대로 하셔야 돼요. 이거 내 동생 옷인데 즉시 갈아입으세요."
그녀는 남자 옷 한 뭉치를 꺼내 내게 건넨 뒤 방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나는 도대체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다.
"다 갈아 입으셨죠?"
그녀가 다시 방문을 열었다.
"이리 나오세요. 여기 비누하고 수건이 있어요. 저기 보이는 길로 곧장 가면 강이 있어요. 시원하게 목욕하고 오세요."

그녀는 억지로 내 등을 떠밀었다. 나는 죽어도 목욕하기가 싫었지만 그녀에게 점수를 따기 위해서 어슬렁거리며 강을 향했다. 알 수 없는 행복감이 강물 위를 지나는 바람처럼 가슴 밑바닥을 훑고 지나갔다.

나는 강물 속에 몸을 담그고 그 동안 쌓였던 개떡같은 내 청춘의 때를 벗겼다. 내 절망의 때를 벗기고, 내 외로움의 때를 벗기고, 내 빈곤의 때를 벗겼다. 나는 내 영혼의 찌든 때까지 모두 벗기고 오는 길에 비로소 고향으로 다시 돌아와 눈시울을 적시는 탕자의 새로됨을 절감하고 있었다. 나는 그날 3년만에 목욕이란 걸 해 본 것이었다.

돌아오는 길은 세상의 모든 것들이 새롭고 신선해 보였다. 맑은 햇빛, 상큼한 바람, 둥실 떠가는 뭉게구름, 멀리서 들리는 농부들의 구성진 노랫소리....

그러나 문득, 한 가닥의 불안이 스쳐지나갔다. 어쩌면 나는 지금 그녀에게 동정받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돈도 없고 빽도 없고, 인물마저 만고강산인 나를 그녀가 과연 애인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인가. 그런 저런 상념에 잡혀서 막 그녀의 집 대문으로 들어섰을 때였다.

나는 순간적으로 숨이 콱 막혀오는 감동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바로 내 눈 높이의 허공에 가로놓여 있는 빨래 줄에는 그토록 거지발싸개같이 때묻고 남루하던 내 티셔츠며 바지들이 깨끗하게 세탁되어진 채 봄볕 속에서 눈부시게 널려 있었던 것이다.

만약 당신이라면 이런 여자와 결혼하지 않고 도대체 어떤 여자와 결혼을 할 것인가.
나는 그 순간 영원히 빨래가 되어 평생을 그 여자에게 세탁되어 지기를 결심했다.  


4. 신혼 시절.

우리의 신혼 여행지는 서울 남산의 어린이 대공원이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라기 보다는 단지 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지독한 추위의 겨울인데도 불구하고 열대식물원 속에서 훈훈함을 만끽할 수 있었다.

마누라가 임신을 하면서 나도 같이 따라 입덧을 심하게 하기 시작했다.
큰애를 임신했을 때가 한 겨울 이었는데 마누라가 갑자기 참외가 먹고 싶다고 했다.
요즘이야 계절에 관계없이 모든 과일을 접할 수 있지만 당시만 해도 겨울의 참외는 꿈같은 이야기였다.
나도 덩달아서 참외가 먹고 싶어 환장할 지경이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참외란 말인가.

결혼 전의 총각 때야 라면쪼가리로 끼니를 때우든가 그것마저 없으면 굶으면 됐지만 지금은 택도 없는 일이었다.
당장의 형편이 참외는 고사하고, 방세는 석 달치나 밀려 있었고 연탄마저 두 어장 밖에 안남은 상태였다.
며칠 전에 마누라가 친정에 가서 몰래 퍼온 몇 됫박의 쌀도 이제 거의 다 떨어져 간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속수무책이었다. 취직 자리도 생기지 않았고 글도 제대로 써지지 않았다. 마누라는 신경이 날카로워질 대로 날카로워져서 아주 작은 일에도 민감한 반응을 나타냈다. 하지만 나는 나대로 같은 증세의 입덧을 하는 중이었고 하는 일마다 뒤틀리기만 했었으므로격렬한 부부싸움을 자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길거리에서 아는 사람을 만났다. 취직하면 갚을 셈치고 모든 자존심을 버린 채, 거의 애원하다시피 해서 얼마간의 돈을 꾸었다.
툭하면 굶던 시절이었으므로 돈 몇 푼에 천만금을 얻은 기분이었다.

돈이 생기자 마누라가 참외가 먹고 싶다고 했던 것을 기억해 내고 혹시나 해서 춘천시내 전 지역을 샅샅이 뒤졌지만 참외는 좀처럼 발견되지 않았다.

멀리서 노란색만 보여도 가슴이 두근거릴 지경이었다.
당시 나는 한심하고 무능한 남편이었기에 내가 그 어떤 장래에 대한 희망을 설계해 주어도 마누라는 절대 믿으려 들지 않았다.
마누라의 웃는 모습을 보기가 여간 힘들지 않을 정도로 우리는 너무나 오랫동안 냉전 상태로 놓여 있었다.
참외를 구할 수만 있다면....마누라는 최소한 손톱만큼이라도 내 진심을 알아주리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아침나절부터 시작해서 거의 해질녘까지 여러 곳의 시장바닥을 헤매고 다녔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마침내 네 개의 참외를 만날 수 있었다.
처음엔 내 눈을 의심했다. 가격을 물으니 세상에나...참외 한 개의 값이 연탄 스무장 값과 맞먹는 액수였다.

지금 집에는 연탄이 다 떨어져 가는데... 하지만 냉방에 자더라도 마누라에게 참외만은 꼭 사다 주고 싶었다. 네 개의 참외 중 세 개만 샀다. 돈이 모자라서였다.
참외는 샀으나 이번엔 당장 쌀과 연탄이 큰 걱정거리로 다가와 가슴을 짓눌렀다.
그것을 사들고 월 삼천 원짜리 어두운 셋방으로 돌아가면서 왠지 자꾸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당시 나는 공처가에서 마악 공포처가로 변해 가는 중이었으므로 마누라가 쌀이나 연탄은 안 사고 참외를 사왔다고 역정을 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지만 아내는 다행히 오랜만에 고마운 표정의 웃는 얼굴을 보여 주었다.
그 이후로도 우리는 너무나 자주 부부 싸움을 벌였는데, 이유는 역시 가난 때문이었다.

"아내가 임신을 했으면 병원에라도 한번 가봐야 할 것 아녜욧!"
백 번 지당한 말씀이다.
하지만 나는 만삭의 아내를 병원에 데리고 갈 능력도 없는 한심한 남편이었다.

그렇지만 말도 안되는 허세로 마누라를 곧잘 공박했다.
"예수님도 마굿간에서 태어났어요. 여긴 마굿간이 아니라 엄연히 방이란 말요. 그러니 한결 좋은 환경이 아니고 뭐요. 옛날 사람들은 병원에 한번 안 가보고도 애들만 무사고로 척척 잘 낳지 않았는가 말요."

기저귓감도 없었고 배냇저고리도 없었고 쌀도 미역도 없었다.
오늘 아니면 내일 애가 태어날지도 모르는 판국인데 그럴 정도로 나는 아무런 준비가 없었다.
준비라고는 그저 "하나님, 제발 저를 좀 도와 주소서."라는 기도 뿐이었다.
나는 마누라의 진통이 심해 질 때마다 정말로 칵 죽어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5. 첫아이를 낳던 날

드디어 해산날이 닥쳤다. 마누라의 진통이 심상찮더니 고통이 극에 달하는 모양이었다.
"나가세요. 혼자 낳겠어요!"
마누라는 무엇인가 굳은 결심을 한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고통을 호소하는 아내를 혼자 남겨 두고 방을 나갈 수가 없었다.
"나가시라니까요!"
나는 마누라가 부끄러워서 그러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마누라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는 표정을 보이고 있었다.
"하나님, 제발 무사하게 해 주옵소서."
속으로 몇 번이나 되뇌이며 마당으로 나왔다. 밖으로는 나왔지만 안절부절못하고 마당을 바삐 서성거려야만 했다.
그때 마누라가 방안에서 다급하게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역시 아내 혼자서 낳기는 무리였던 모양이었다.
나는 황급히 방안으로 뛰어 들었다.
그리고 마누라로 하여금 내 허리를 끌어안게 하고 나는 두 손으로 문고리를 힘주어 부여잡았다.
두 시간 동안 우리 둘은 사경을 헤매야했다.
아내는 고통을 참느라고 어찌나 세게 입술을 깨물었는지 피까지 배어 나오고 있었다. 나는 내 팔뚝이라도 물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문고리가 두 번이나 빠져서 바깥 문고리에다 허리띠를 매고 다시 아내를 격려했던 기억은 나는데 그 다음은 어찌나 얼이 빠졌던지 기억을 전혀 할 수가 없었다.
애를 받아 놓고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장모님이 오셔서 일을 돌보고 계셨다. 죄스럽기 짝이 없었다.
"사낼세. 앞으로 이 애를 위해서라도 부디 열심히 살아야 하네."
그 말 한 마디를 듣고 밖으로 나왔다.

햇빛이 눈부셨고 사방은 고요했다. 왠지 눈물이 고여왔다.
자식을 어떻게 해서든 나처럼 살게는 않겠다고 결심을 하면서 그 길로 시내로 나와 월부책 장사가 됐다.
아는 사람들에게나 모르는 사람에게 카드를 꺼내 놓으면서 차마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신이라도 도우신 것일까.

이상하게도 모두들 아무런 부담없이 싸인을 해 주곤 했던 것이다. 그 동안 무슨 일을 해도 제대로 되지 않더니 그 날만은 한꺼번에 만사가 형통할 것처럼 모든 일이 잘 풀려 나갔다.

나는 그날 놀랍게도 십만 원이라는 거액을 벌었다.
내가 사람들에게 월부책 카드만 꺼내 놓으면 무엇에라도 홀린 것처럼 별로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도와주곤 했던 것이다.

그 날 저녁 늦게까지 일을 한 나는 미역을 사서 옆구리에 낀 채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정육점 안으로 들어섰다.
"산모한테 양지머리가 좋다던데 두 근만 주십시오. 사실 저는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소고기를 사보는 겁니다. 우리 마누라가 아들을 낳았거든요."
나의 흥분된 목소리와는 상관없이 정육점 주인은 나를 흘깃 쳐다보고는 지극히 사무적인 태도로 썩둑썩둑 칼질을 했다.
저울에다는 것을 보니까 고기가 전체적으로 허연빛을 띠고 있었다. 양지머리라는 것은 으레 허연 빛을 띠는 것인가 보다라고 나는 생각했다.

미역과 소고기를 사들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내 자신이 얼마나 자랑스러웠는지 절로 휘파람이 새어 나왔다.

그러나 막상 집에 도착해 보니 장모님도 마누라도 나를 별로 탐탁찮게 여기는 눈치였다.
"오늘 같은 날 하루 종일 어디를 그리 쏘다니다 이제야 나타나누. 자네도 참 한심하네."
양지머리라는 걸 펼쳐 보신 장모님의 하시는 말씀은 나를 한심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바보천치취급 하는 느낌을 받았다.
"이 서방. 자네 몰라도 어찌 그리도 모르는가. 이게 양지머리라니...어디 가서 비게덩어리만 얻어 왔구만. 주는 사람도 그렇지. 아무리 그저 주는 것이라 해도 살점이 한사람 한 끼 반찬거리는 되어야 할 게 아닌가."
허연 것은 비계고 뻘건 것만 살코기라는 말을 듣자 나는 당장 정육점 주인에게로 달려가 놈의 모가지를 시궁창에 쑤셔 박아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잡놈들의 세상.... 나는 굴뚝 뒤로 돌아가 벽에 머리를 기대고 혼자 울었다.
놈은 나를 정말 천치처럼 생각했으리라. 거지같이 남루한 행색에다 시종일관 벙긋벙긋 웃음을 흘리는 모습. 게다가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소고기를 사본다는 등 헤프게 떠드는 소리...놈은 그야말로 호구하나 만났구나 싶었을 것이다.

나는 처음으로 타의에 대한 살의로 몸을 부들부들 떨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참았다. 칼을 사용하는 자와 펜을 사용하는 자의 마음이 어찌 같을 수가 있느냐고 자위하면서.

이제 세월이 흘러 당시를 추억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그 때 그렇게 어려운 환경에서 태어난 아이가 이제 장정이 되어있다. 장성한 아이를 보면서 녀석이 뱃속에 있을 때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라진다.

마누라는 물론이고 나까지 심하게 입덧을 했던 일...석 달치나 밀린 방세. 구멍가게의 외상값 독촉. 구해지지 않는 취직자리. 주위 사람들의 비웃음. 막막한 장래. 끝없는 부부 싸움. 방황. 겹치는 액운. 어제도 가난했으며 오늘도 아니, 영원히 가난하리라는 생각. 모든 치욕과 외로움을 참아가며 글쓰던 일.....

세상사람들이여.
가난하기 때문에 사랑할 수 없다는 말은 있을 수 없다.
보라. 그 겨울에 우리 마누라가 먹은 세 개의 노란 참외는 저리도 환하게 밝아져 든든하게 자라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