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빈치 코드와 성혈, 성배
댄 브라운의 베스트셀러 『다 빈치 코드』가 톰 행크스가 주연하는 영화로 만들어져 이번 주 드디어 전 세계에서 개봉될 예정입니다. 책이 4천 만권 정도 팔렸으니 영화도 어쩌면 해리포터 시리즈를 능가하는 기록을 세우게 될지 귀추가 주목됩니다. 상영을 저지하고자 했던 한국 기독교 교단의 움직임은 결과적으로 이 영화의 상업적 성공에 일정 부분 기여한 것으로 기록될 것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비록 의도는 그것이 아니지만, 지금 제가 쓰는 이 글 역시 비슷한 효과를 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미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베스트셀러에 대해 철 지난 감상을 늘어놓거나 또는 한가한 문화 비평으로 영화의 홍보를 도울 의도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선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랄까 이유를 잠시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다 빈치 코드』의 엄청난 상업적 성공을 가져 온 요소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서구 사회의 다양한 밀교의식(密敎儀式, esoteric rituals)에 대한 움베르토 에코류의 지적 토대 위에 코넌 도일류의 명석한 주인공이 갖고 있는 천부적 센스, 그리고 인디애나 존스 타입의 액션과 반전 등이 파리, 런던, 스코틀랜드 등지에서 펼쳐지는 스릴러라 해도, 이 소설의 성공을 설명하기엔 부족합니다. 그런 요소들도 중요하지만, 그 중심 스토리 라인이 서구 기독교 문명이 고수해 온 도그마에 대한 도전을 주축으로 삼지 않았다면 그처럼 크게 히트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다빈치 코드의 중심 주제는 레오나르도의 그림이나 시온 수도회의 비밀 따위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결혼을 했었는가 아닌가 또는 그 자손이 고대 프랑스 남부로 피신하여 메로빙거 왕조와 결합했었는가 아닌가도 아닙니다.
『다 빈치 코드』는 본질적으로 예수의 신성(神性)에 대한 도전적 음모론을 기반으로 한 매우 정교한 스릴러인 것입니다. 이 소설은 예수의 신성(divinity)과 삼위일체의 도그마 위에서 서구 사회를 2000년간 지배해 온 기독교의 세속적 제도와 프로퍼갠더(secular, religious institutional propaganda)에 대한 회의를 효과적으로 촉발하는 힘을 지닌 것으로 생각됩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 책의 상업적 성공은 그런 회의의 광범위함을 증거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물론 예수의 신성에 대한 논란은 초기 기독교시대부터 현재까지 늘 존재했고 존재하는 것입니다. 오랜 기간 억압과 처벌 그리고 조직적 말살에도 불구하고 논란의 깊은 뿌리는 살아남았던 것입니다. 특히 1, 2차 세계대전을 치른 뒤 20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기독교의 역사와 제도적 권위에 대한 도전적 연구와 저술은 매우 자유롭고 대담하게 때로 무책임하게 진행되어 왔습니다.
많은 서구 지식인들이 개인의 신앙적 양심과 교회가 요구하는 실천적 신앙 사이에 존재하는 불편한 간격을 보다 뚜렷이 인식하게 되었으며, 말로 표현하든 안 하든, 적지 않은 서구 지성인들이 그들이 이해하는 예수의 가르침과 세속적 제도로서의 기독교 교회가 갖고 있는 실체적 역사와 현실이 매우 동떨어져 있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많은 경우, 세속적 종교권력에 대한 그들의 반감과 저항은 우회적 경로로 표출되었습니다. 기독교가 정통으로 인정하는 역사적 이벤트에 대한 비판이나 부분적 교리에 대한 크고 작은 도전을 통해, 그들은 2000년 동안 그들을 지배해 온 권력의 장벽에 작은 흠집과 균열을 만들고자 한 것입니다. 그들 가운데 다수는 예수가 결혼을 했는가 안 했는가 또는 그가 하느님과 동격이고 일체인가 아닌가 하는 도그마적 이슈는 그리 중요한 사안이 아닙니다. 그들이 정작 하고 싶은 것은 교회권력의 부패와 세속적 범죄행위에 대한 고발과 규탄인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 모두가 예수의 가르침을 무시하거나 기독교적 구원 자체를 부정하는 자들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또한 모두 루터 같은 신념이나 헨리 8세 같은 배짱의 소유자들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지금도 기독교 사회 내에서 공개적으로 교회를 비판하는 것은 대단히 무모한 일입니다. 그 누구도 100% 확신할 수 없는 절대적 신앙 체계의 도그마에 도전을 감행하고 스스로 고립된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닐뿐더러 더 큰 난관은 그것이 가치 있는 도전임을 증명할 길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들은 그런 시도를 멈추지 않는 것일까 생각해 봅니다. 그들이 모두 적그리스도거나 사탄의 제자들이라 그런 것일까요? 그렇다고 강력한 신념을 가지고 말할 사람도 많을 것입니다만, 그렇다면 그 사탄의 제자를 길러내는 역할의 상당 부분을 교회가 하고 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역설적이지만 기독교 사상과 교리에 대한 도전은 교회가 스스로 자초한 것이 대부분입니다. 교회가 예수의 진정한 가르침을 전하고 실천하는 도구인지, 아니면 그를 빙자하여 세속적 부와 권력을 추구하는 집단인지 판단하기 곤혹스럽게 만든 것은 교회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서구 역사 2000년 동안 저질러진 무수한 전쟁과 살육 등의 거대 범죄 행위엔 반드시 라고 할 정도로 기독교 교회가 깊이 개입되어 있음을 감안하면, 이것은 단순히 절대자에 대한 인간적 의구심이나 회의가 초래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구원을 갈구하고 그 매개체를 찾는 인간의 원초적 갈망에 충돌하는 교회의 역사적 진실과 정체성의 문제인 것입니다. 인본주의(Humanism)나 개인주의적 사상들의 영향을 받은 의도적 반기독교 세력도 엄연히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존재가 교회에 대한 모든 타당한 의문을 부정할 근거는 될 수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기독교의 세속적 제도가 진정으로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전하기 위한 존재였다면, 그들이 강력한 권력으로 작용해 온 서구 역사가 어떻게 그토록 죄악과 잔인함으로 점철될 수 있었고 지금도 그러한지를 누군가 답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 빈치 코드』의 상영이 현대인의 생각과 판단에 일정 부분 영향을 미칠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진리를 바꾸거나 사라지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진리는 예수가 전한 복음 속에 명확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그 복음은 예수의 결혼 여부나 그 후손의 존재 유무에 의해 변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 예수가 단순히 훌륭한 예언자인지 유일신과 동격이고 일체인지 여부조차도 이 진리의 본질을 흔들 수는 없을 것입니다. 기독교의 구원은 복음의 “말씀”에 있고, 구원의 주재자 역시 “말씀”이며, 따라서 기독교 신앙의 알파와 오메가는 “말씀”일 따름입니다. 교회의 존재 당위성은 그들이 이 “말씀”을 제대로 전하고 구원의 주재자가 요구하는 실천적 덕목을 앞서서 실천하는가 그렇지 못한가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율법은 어려워도 생명의 진리는 이해하기 어려울 수 없습니다. 성경 66편의 장과 절을 몽땅 외운다고 그 사람의 진리가 더 고귀해 지는 것도 아니며, 구원에 가까워지는 것도 아닙니다. 법을 몰라도 온당한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처럼, 히브리 역사를 몰라도 어째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하나인지를 몰라도 구원의 말씀을 이해하고 의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날, 교황부터 전 세계 신부나 목사들이 진정으로 예수가 가르친 진리와 덕목을 실천하고 “말씀”을 따르고 의지한다면, 『다 빈치 코드』는 진리의 본질에 대해 다시 말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좋은 기회에 불과할 것입니다. 사탄의 유혹과 시험이 없었다면 예수는 몇 가지 유익한 진리의 말씀을 천명할 기회가 없었을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어떤 소설이나 영화가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이해되고 받아 들여질 것인지는, 다른 많은 유사한 작품들 또는 현대 사회의 많은 문화적 코드와 마찬가지로, 문명의 전체적 흐름과 경향 속에서 고찰되고 평가되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예술 작품이나 문화적 코드는 일정 부분 시대를 반영하고 또한 그 기능을 통해 미래를 형성해 가는 하나의 모티브 또는 동력으로 작용합니다. 『다 빈치 코드』라는 하나의 문화적 현상이 우리 시대의 무엇을 반영하고 또한 미래에 무엇을 투영할 것인지는 고려해 볼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댄 브라운과 그의 책들
저는 댄 브라운이 의인인지 사탄의 제자인지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재기 넘치는 작가이며 그의 작품은 우리 시대가 소유한 문화적 유산에 대한 일정한 의문을 반영하는 것이며, 그의 작품을 통해 좀 더 많은 사람들이 교회의 정체성과 역사적 진실에 관심을 갖게 될 수 있다는 것은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반드시 인류에게 긍정적일 것인지 오히려 해악을 증가시킬 것인지는 지금 판단하기에 벅찬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댄 브라운은 1998년부터 2003년까지 4권의 소설을 발표했습니다. 『다 빈치 코드』는 그 4권 가운데 가장 최근에 발표된 책입니다. 얼마 전 서점에 들려보니 그의 다른 책들도 이제 모두 다 번역되어 나온 것 같습니다. 저는 그것들이 번역되어 나오기 전에 한꺼번에 구해 읽어 본 일이 있습니다. 취향에 맞는지 하루에 한 권씩 재미있게 읽었고, 느낌은 4권 모두 상당한 리서치가 필요했을 것이며, 매우 재능 있는 이야기꾼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일종의 지적(知的) 스릴러들로, 각기 내용은 달라도 하나의 “거대 음모”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1998년 작품 “Digital Fortress”는 마침 지금 미국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NSA의 거대한 도청/해독 컴퓨터 시스템(TRANSLTR)을 둘러 싼 스릴러입니다. NSA의 조직과 기능을 일부분만 소개한 것이지만, 그래도 그들이 어떤 존재인지 느끼기엔 충분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 일하는 개인들의 직업의식과 선악의 정도가 이 조직의 의식이나 선악을 대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유념할 필요는 있을 것입니다. 거대해진 인간 조직은 왕왕 그 부분을 구성하는 인간 개개인의 사유나 판단을 오버라이딩(overriding) 하기 때문입니다.
2000년 발표된 “Angel & Demon”은 사실상 『다 빈치 코드』의 전편입니다. 주인공의 이름 역시 『다 빈치 코드』에 나오는 로버트 랭던(Robert Langdon)입니다. 바티칸과 스위스에 있는 CERN(Conseil Europeen pour la Recherche Nucleaire ; 유럽 핵입자 연구소)을 주 무대로, 가톨릭교회와 서구 과학의 오랜 갈등 관계에 일루미나티 라는 악역이 등장하여 전개되는 스릴러입니다. 일루미나티를 자의적으로 왜곡하고 흘러간 전설로 만들었다는 비판은 면하기 힘들겠지만, 역시 훌륭한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억하기로 이 책엔 다섯 개의 놀랄 만한 문자 도형이 등장합니다. 예를 들어 “ILLUMINATI”라는 단어를 교묘하게 디자인하여 똑바로 봐도 illuminati고 거꾸로 봐도 똑 같은 형태의 illuminati가 됩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Earth, Air, Fire, Water라는 네 단어를 하나의 화인(火印, brand)에 새겨 넣는데, 이것을 거꾸로 보아도 똑 같은 형태, 똑 같은 순서로 읽힌다는 것입니다.
댄 브라운에게 이처럼 천재적 디자인을 해 준 사람의 이름이 존 랭던인가 하는 사람이고, 그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로버트 랭던이란 이름을 주인공으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로마 관광청 사람들이 매우 고마워할 법한 이 소설의 핵심은 과학과 종교 사이의 미묘하고도 끊을 수 없는 상관관계에 대한 것입니다. 특히 후반부에 등장하는, 살해당한 전임 교황의 까멜렝고(camerlengo, 신임 교황이 될 뻔했던 전임 교황의 비서실장?)가 하는 일장 연설은 음미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2001년 발표된 “Deception Point”라는 책은 NASA와 미국 정치권력의 이익을 위해 북극의 얼음 속에서 외계 생명체의 흔적이 발견되는 일련의 정치적 조작극에 말려든 과학자들과 정치인 그리고 정보기관 사이에 벌어지는 스릴러입니다. 댄 브라운의 다른 소설들도 그렇지만, 특히 이 소설은 그 종결부에 거친 극적 반전(dues ex machine)들을 도입하여 팽팽했던 긴장을 허탈함으로 승화시켜 줍니다.^^
그리고 2003년에 발표된 『다 빈치 코드』입니다. 댄 브라운은 이 네 권의 소설 중두 권은 일반적인 “프롤로그”로 시작하는데, Angel &Demon과 The Da Vinci Code 두 권은 “Fact”라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 책들에 등장하는 이런 저런 것들이 사실이란 점을 강조하고 시작하는 것입니다. 전자의 경우, 반물질(antimatter)에 대해서 그리고 후자의 경우, 시온 수도회(The Priory of Sion)와 오푸스 데이(Opus Dei)에 대해 언급합니다. 그에 더하여 치밀한 플롯과 설득력 있는 화술은 독자들에게 소설의 내용과 실체적 진실을 구분하기 힘들게 만드는 효과가 있습니다. 공통적 취약점인 결말 부분의 거친 반전만 없다면, 많은 독자들이 자신이 읽은 것이 픽션인지 논픽션인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다 빈치 코드』의 표절 시비
지난 4월 초, 영국 런던에서 이 소설에 제기된 표절 소송에 대한 법원 판결이 있었습니다. 결론은 소송을 제기한 원고가 패소했고 그들은 아마 항소하지 않을 것입니다. 댄 브라운을 고소한 사람들은 1982년 『성혈, 성배』(Holy Blood, Holy Grail)라는 논픽션을 출간했던 세 명의 공저자 가운데, 마이클 베이젼트와 리챠드 레이, 두 사람이었습니다. (Michael Baigent, Richard Leigh, Henry Lincorn)
마이클 베이젼트와 리차드 레이는 자신들의 책이 소개한 많은 리서치와 아이디어의 구조를 댄 브라운이 다빈치 코드에 도용했고 따라서 표절(Plagiary)이라는 주장을 제기했습니다. 이에 대해 댄 브라운은 자신과 그의 아내가 『성혈, 성배』를 읽고 거기서 취득한 것들을 작품에 채용했다고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런던 법원은, 표절이란 아이디어를 훔친 것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디어의 표현 형태(form of expression)”을 훔칠 때 적용되는 것이라는 논지로 원고 패소를 선고했습니다.
저는 이 논지에 동의합니다. 적절한 비유인지는 몰라도, 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성이론 논문을 읽고 그것의 일정 부분을 자신의 연구인양 물리학 저널에 발표한다면 그것은 당연히 표절입니다. 그러나 그 논문에서 얻은 아이디어를 이용하여 뮤지컬 대본을 구성한다거나 블랙홀에 대한 SF소설이 쓰여졌다면, 아인슈타인이 크게 불만스러워 하진 않을 것입니다. 물론 그런 경우, 작품 어딘가에서 영감을 심어 준 사람을 언급하거나 감사를 표하는 것이 대개의 작가들이 갖고 있는 상식적 매너일 것입니다.
댄 브라운은 『성혈, 성배』에 소개된 많은 아이디어를 차용 했고 소설의 메인 플롯을 구성하는데 이용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책 어디에도 『성혈, 성배』의 저자들에 대한 감사나 언급이 없는 것을 발견하고 매우 의아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런 침묵이 설사 책의 흥행에 도움이 된다 할지라도 양심이나 매너의 측면에선 바람직하지 않음을 모를 리는 없는데, 무슨 의도로 그랬을까 이해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 매너나 양심이 법적 표절 시비를 가늠하는 쟁점이 되지는 않겠지만, 그런 무례함이 원고들을 더 자극하지는 않았을까 혼자 생각해 보기도 했던 것입니다.
『성혈, 성배』는 높이 평가하면 역사 연구서에 가깝고 낮게 평가해도 상상력이 효과적으로 가미된 논픽션 다큐멘터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얼마 전, 국내 모 방송사가 다 빈치 코드와 관련해서 이 책을 인용하며 무슨 비밀을 파헤치니 하며 2회에 걸쳐 방송한 것을 보았습니다. 책이 흥행에 성공하다 보니 아무나 흥미 위주로 다루는 것을 보며, 다소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솔직히 『성혈, 성배』는 그런 프로에서 선정적으로 다룰 수준의 가벼운 저작물은 아닙니다.
어쨌든, 원고들은 공연히 소송을 걸었다 패소하여 물경 300만 파운드에 달하는 소송비용을 부담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대단한 상업적 성공을 거둔 다빈치 코드에 뼈와 살을 제공하고, 공연히 시비 걸었다가 엄청난 금전적 부담을 안게 되었으니, 울고 싶을 것입니다. 울고 싶어야 당연한 것 아닐까요? 300만 파운드란 금액은 웬만한 작가들이 쉽게 감당할 수 있는 돈이 아닙니다. 한 마디로 베이젼트와 레이는 망한 겁니다. 그런데, 그들이 런던 법정을 나오는 모습에선 망한 자들의 당혹스러움이나 분노 따위를 전혀 찾을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재미있게 놀다 나오는 듯한 여유로운 모습이었습니다. “아니 쟤들이 뭘 믿고 저렇게..” 하는 의아심이 절로 드는 순간이었습니다.
댄 브라운의 소설 판권을 가진 출판사나 『성혈, 성배』의 신판(작년 11월 출간) 판권을 가진 출판사나 모두 랜덤하우스라는 거대 출판사의 자회사들입니다. 저작권이나 표절 소송에 누구보다 정통할 출판사가, 지금 현재 황금알을 낳고 있는 자사의 오리들끼리 결과가 뻔히 예측되는 이런 소송으로 누군가 머리 터지는 걸 방치했을 까닭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소송은 걸렸고 한 쪽은 거액의 배상을 해야 하는 결과가 나온 것입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만일, 이번 소송이 『다 빈치 코드』와 더불어 『성혈, 성배』의 홍보와 동반 매출 신장을 노린 출판사의 기획과 사주에 따라 베이젼트와 레이가 자발적으로 협조한 “마케팅” 차원의 연극이었다면? 이상할 것도 없고 패소한 자들의 여유 있는 미소도 이해 못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실제 지금 판매되는 『성혈, 성배』의 2005년 11월 판 하드 바운드는 종전보다 몇 십 배에 달하는 매출을 달성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댄 브라운이 베이젼트와 레이에 대해 아무 언급도 안 했다고 생각한 것 역시 착각이었습니다. 『다 빈치 코드』를 읽으신 분들은 기억하시겠지만, 거기 등장하는 악역의 이름이 Sir Leigh Teabing 입니다. 레이는 리챠드 레이를 나타내는 것이고 티빙(Teabing)은 마이클 베이젼트(Baigent)의 철자를 풀어 만든 소위 아나그램(anagram)이란 것입니다. 다시 말해 댄 브라운은 악역 주인공의 이름을 통해 레이와 베이젼트에게 감사의 시그널을 보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뭔가 감이 잡히시는지요?
[너무 지루하실 것 같아 오늘은 여기서 끝냅니다. 반대하지 않으신다면 성혈 성배에 대해 두 번 정도 더 말씀 드릴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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