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나르 베르베르는 ‘개미’에서 개미들이 궁극적 경외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다섯 개의 기둥을 말한다. 다름 아닌 인간의 손가락들이다. 그 기둥을 만나면 개미에겐 죽음이다. 왜 죽어야 하는지, 그 기둥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개미들의 세계에 종교가 있다면 그 다섯 개의 기둥을 숭배하는 오주교(五柱敎) 같은 종교가 있을지도 모른다. 미치오 가쿠 (Michio Kaku)라는 이론물리학자는 그의 초공간(Hyperspace)이란 저서를 잉어들이 수련(睡蓮) 아래를 유유하게 헤엄치는 연못에 대한 생각으로 시작하고 있다.
그 좁은 연못에서 전 생애를 마친 잉어들은 ‘우주’가 뿌연 물과 수련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믿을 수 있다. 대부분의 시간을 연못 바닥에서 먹이를 찾는 일에 허비했다면, 수면 너머에 어떤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어렴풋이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인간이 사는 세계는 그들의 이해 한계를 벗어 나는 것이다. 잉어와 잉어를 바라보는 나는 불과 몇 센티밖에 떨어져 있지 않지만, 잉어들에게 그 몇 센티는 무한에 가까운 깊은 불가지(不可知)의 구렁텅이인 것이다. 서로 별개의 세계에 살고 있지만, 그것들의 경계는 더할 수 없이 얇은 수면에 불과한 것이다.
어떤 잉어가 수련 바로 위에 또 다른 평행 세계가 존재한다고 말할 경우, 잉어 세계에도 과학자들이 있다면 그들은 그 잉어가 맛이 좀 갔다고 조롱할 수 있다. 잉어 과학자에게 실재하는 것은 그들이 보고 만질 수 있는 것뿐이다. 그들에게 연못을 넘어 선 세계는 과학적 의미가 없는 신화적 상상 공간에 불과할 것이다. 그런데 폭풍우가 불어 수면에 무수한 빗방울 포탄이 떨어지고 건들이지도 않은 수련이 혼자 이리 저리 움직인다면, 잉어들은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연못의 물은 우리의 공기나 우주공간처럼 잉어들의 눈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보이지 않는 무엇에 의해 움직이는 수련이 곤혹스러워 질 것이다. 비상한 천재 잉어 과학자가 태어나 수련들은 그것들 사이에 작용하는 어떤 신비하고 볼 수 없는 실체에 의해 건드리지 않아도 움직일 수 있다는 이론을 내어 놓을 수 있다. 그리고 그것에 ‘무접촉 원거리 작용력’ 같은 고상하고 인상적인 이름을 붙일 수 있다.
내가 한 마리의 잉어를 뜰채로 건져 올리면 연못에 남아 있는 잉어들은 갑자기 사라진 동료 잉어의 실종을 어떻게 볼 것인가? 내가 서 있는 지점 근처의 수면에 ‘버뮤다 삼각지대’ 같은 이름을 붙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내가 그 잉어를 얼마 있다 다시 연못에 돌려 보내면, 잉어들의 눈에는 기적이 나타난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 잉어는 일약 ‘유명 잉어’가 되어 매스컴의 집중 취재 대상이 될 것이다. 돌아 온 잉어는 갑자기 눈 부신 빛의 세계로 들어 올려져 그곳에서 조우한 온갖 이상한 물체와 존재에 대해 이야기 할 것이다.
개미가 인간의 손가락을 공포의 다섯 기둥으로 보았듯, 잉어는 지느러미 없이 움직이는 인간의 괴이한 모습에 대해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늘어 놓을 것이다. 우리는 이 우주(우리가 인식하는 우주가 아니라 존재하는 우주)에서 그 개미나 잉어와 같은 존재는 아닐까? 우리는 우리가 보고 만질 수 있고 냄새 맡을 수 있는 것들로만 이루어진 것이 세계라고 확신 또는 착각하며, 우리 자신의 ‘연못’ 속에서 헤엄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인간의 정신은 과연 이 시간과 공간의 차원을 넘어 그 인식의 한계를 확장할 수 있는 존재일까?
얼마 전, 몇 십억 광년 떨어진 곳에서 블랙홀로 흡수되며 폭발하는 원시 우주가 망원경에 포착되었다고 한다. 빅뱅이 대략 150 억년 전에 발생한 우주적 사건이라면, 몇 십 억년을 달려 온 이 빛이 전하는 메시지는 빅뱅 이후 100억년도 넘는 시간이 흐른 후에 발생한 사건을 전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초기 우주의 해프닝들 가운데 현재까지 감지된 가장 오래 전 사건인 것이다. 우리 연못 안에서 불과 몇 천년 전에 일어 난 일도 재구성하지 못하는 인간이 100억 년 전에 수 십억 광년 멀리에서 일어 난 일을 과연 재구성할 수 있을 것인지, 실로 궁금한 일이다.
멀다고 표현할 수도 없는 먼 거리를 달려 온 그 빛은 그보다 앞서 출발한 수 많은 다른 빛과 물질의 장애를 뚫고 오늘 우리에게 왜곡되지 않은 사상(事象, event)의 진면목을 전하고 있는 것인가?
인간이 개미나 잉어와는 다른 어떤 소양을 갖고 있는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그러나 모두 환경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 역시 진실일 것이다. 환경의 지배란 말에는 환경이 유도하는 인식의 환상(illusive perception, maya)도 포함되어야 한다. 인간이 잉어보다 뛰어 난 어떤 소양(quality)을 갖고 있다는 추론은 인간의 환상적 인식 능력(또는 착각 능력) 역시 그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화려하고 장대할 수 있다는 개연성을 암시하는 것이다.
실체 또는 현실이란 것은 리얼리티(reality) 자체가 아니라 우리가 리얼리티라고 생각하는 것, 즉 경험을 통해 우리가 발견한 것들이다. 모든 사람은 각자가 그렇게 체득한 경험을 실체적 진실로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술이 취해 길이 움직이는 것처럼 느낄 때, 우리는 그 느낌이 경험을 통해 알고 있는 실체적 진실(길은 움직이지 않는다)이 아니라, 알코올에 의해 나타난 환각임을 인지할 수 있다. 그러나 항상 그렇게 인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똑같이 술이 취한 상태에서 10,000원짜리 지폐를 1,000원짜리로 착각하고 택시 기사에게 건넬 때, 우리는 그것이 환각에 의한 것임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맥아더라는 한 미국 군인의 개체적 진실이 무엇인가를 놓고 사회가 시끄럽다. 그가 대한민국의 은인이라는 사람도 있고, 분단을 야기하고 고착시킨 주범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것은 맥아더라는 한 인간의 개체적 진실과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그에 대해 갖고 있는 주관적 진실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느 한 편이 술에 취한 것인지, 또는 모두 술에 취한 것인지 알기 힘든 상황이기에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몸 싸움의 지경까지 가고 있는 것이다. 역사적 진실이나 맥아더 개인의 진실은 분명 어딘가에 존재할 것이지만, 마치 잉어의 세계관과 인간의 세계관이 다른 것처럼 충돌하는 것이다.
잉어는 수련이 혼자 흔들리는 것에 당혹감을 느낄 수 있지만, 인간은 폭풍우 속에서 그런 흔들림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기에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다른 물에서 놀고 있는 두 패의 잉어 같다. 한 쪽은 소위 ‘은혜론’의 세계에 헤엄치고 있는 잉어이고 다른 한 쪽은 ‘민족론’ 또는 ‘분단원인론’의 세계에 헤엄치고 있는 잉어 같다. 따져야 할 것은 은혜론의 세계관이 옳은 것이냐 분단원인론의 세계관이 옳으냐 이다. 동상을 그대로 둘 것이냐 철거하느냐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역사적 진실은 진실로서 규명해야 하는 것이고,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두 개의 세계관은 그것대로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한 쪽 세계관이 틀린다고 그쪽 잉어들은 모두 나가 죽어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철거 여부 논쟁은 진실의 규명과 그것을 통한 세계관의 합의보다, 서로 상대의 세계관부터 파괴하고 보려는 성급한 행동이다. 진실이 무엇이고 누구의 세계관이 더 타당한 것이냐가 모두 토의되고 합의된 다음에도 동상은 그 자리에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물질적 존재에 불과하다. 그 동상 앞에 또는 그 철거된 자리에 합의된 진실을 설명하는 팻말 하나 세우면 족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존재하면 역사가 바로 설 수 없는 것처럼 주장하는 자들이나 철거되면 배은망덕한 민족이라도 되는 것처럼 드잡이를 하며 다투는 모습은 수련이 흔들리는 이유를 놓고 다투는 잉어보다 더 어리석어 보인다.
옛날 중앙청을 철거할 때도 논란이 많았다. 그럼에도 결국 철거되었다. 그러나 그 때 역사적 또는 경제적 이유로 그 건물을 그대로 두었다고 무슨 큰 일이 나는 것은 아니다. 그 건물이 철거되었다고 일본이 제국주의 침략행위를 진실로 뉘우치는 것도 아니고 친일파들이 모두 고개를 땅에 묻고 숨은 것도 아니다. 쌍벽을 이뤄 일본(日本)이란 글자를 그리는 시청 건물은 아직도 이명박이가 잘 쓰고 있으며, 서대문 형무소는 박물관이 되어 있지 않은가? 시청 건물이나 서대문 형무소가 있어서 친일 반민족 행위 규명이나 친일파 청산이 안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 때문에 서울 시민이나 서대문 구민의 민족 정기가 훼손된다는 풍수는 믿을 수 없는 주장이다. (기분이야 나쁘지만) 문제의 요체는 철거 여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실체적 진실에 대한 철저한 규명과 그 결과에 대한 동의가 없는 것에 머무르고 있는 것이다.
말이 나온 김에 좀 더 하자. 우리 사회는 실체적 문제의 해결을 위해 밟는 수순이 너무 성급하고 서툴다. 하나의 실체에 대해 두 개 이상의 진실이 존재하기는 어려운 것이니, 그런 맥락의 대립이 있을 때는 다른 주장들을 모두 꺼내어 놓고, 요모조모 면밀하게 검토하여, 대립 당사자들이 동의할 수 있는 결론을 모색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검토와 동의가 모두 중요한 것이다. 대립 당사자들이 다툰다는 것은 검토 노력이 불충분하거나 동의를 이끌어 내는 대화와 설득의 기술이 부족하다는 것, 또는 두 가지 모두 부족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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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 동상을 둘러싼 경찰
ⓒ2005 오마이뉴스
이철우
분단과 전쟁, 그리고 오늘까지 복잡하게 얽히고 설킨 역사적 진실은 너와 나에겐 없는지 몰라도 어딘가에는 존재하는 것이다.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고, 일반의 인식에 적절한 동질성이 없다고 진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거는 될 수 없다. 그렇다면 먼저 그 역사적 실체를 가장 근접하게 밝히고 그것을 통해 인식의 동질성을 필요한 수준까지 끌어 올리려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상식 이상의 그 무엇이 아니다. 그런데 그런 상식이 엄청 달리는 사회가 우리 사회의 현 주소인 것 같다.
소위 민족주의를 대변하고 전쟁 범죄를 규탄하는 사람이라면,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이 민족정신의 동질성 회복이 아니겠는가? 그것을 위해 실체적 진실을 상대가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규명하고 설득하는 과정을 거쳤는가? 불필요한 갈등을 최소화 하는 길은 자신의 진실을 밀어 붙이는 것이 아니라 설득하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밀어 붙이고 있는 양측의 주장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실체적 진실의 과녁에 정확하게 맞은 것이 아니라면 어쩔 것인가?
우선 분단의 원흉이 맥아더라는 주장은 1945년 전승국들의 세계 지도 새로 그리기의 주역이 맥아더였다는 주장이 아닌 이상 옳을 수 없는 것이다. 그는 가장 나쁘게 보아 그들의 하수인이었고, 독선적이고 친일적인 반면에 한국을 사랑하거나 한국민의 생명을 크게 존중하지 않았던 직업 군인의 하나에 불과하다. 그가 정치에 야심을 품고 한국 전쟁을 도구화한 전쟁 미치광이였다는 주장 역시 매우 결과론적이고 주관적인 주장이다.
모든 전쟁은 정치적 목적 때문에 발생하지만, 일단 발생한 전쟁은 승리를 가장 큰 또는 유일한 덕목으로 여기고 굴러 가는 잔인한 관성을 갖게 된다. 클라우제비츠의 관찰이다. 도덕적 명분으로 시작되는 전쟁은 있을 수 있어도 도덕적으로 싸우고 끝내는 전쟁은 없다. 역사가 증명하는 것이다.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6.25 전쟁을 미국의 단독 범행으로 보는 것은 실체적 진실에서 빗나간 관점이다. 예를 들어, 소련의 비토가 있었으면 소위 유엔군의 참전은 불가능했다. 미국이 한국전에 개입한 명분이 유엔군 자격이었음을 잊으면 안 된다. 당시 소련 유엔대사는 유엔군 파병안을 놓고 안전보장이사회 표결이 있기 직전에 화장실을 갔든 담배를 피우러 나갔든, 밖으로 나가 스스로 기권하고 비토를 행사하지 않았다. 표결이 끝나자 곧 돌아 와 다시 다른 이야기를 나눈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소련은 미국과 다른 15개국의 한국전 참전을 봉쇄하여, 결과적으로 김일성의 침략통일 기도가 성공할 수 있는 결정적인 전략적 우위를 스스로 포기한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소련이 원한 것은 전쟁 그 자체였지, 전쟁의 승리나 한 반도의 완전한 공산화가 아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엔군이 파병된 다음, 유엔에서 한국전 모니터링 업무를 맡은 사람이 소련 군 장성이었던 것을 알아야 한다. 미국은 한반도에서 소련제 비행기와 탱크를 상대로 싸우고 소련 고문단의 전술과 맞섰겠지만, 유엔에서는 스탈린에게 보고하는 소련군 장성에게 미군(유엔군)의 전황과 작전 계획을 보고하고 인준 받았던 것이다. 소련은 북한측은 물론이고 남한 즉 유엔군 측의 움직임을 사전, 사후 모두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분단이 그러했듯, 전쟁 역시 미국과 소련의 합작품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과 소련의 이런 전쟁 합작 공연을 연출한 자는 누구인가? 전쟁의 원흉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그 자가 아니겠는가? 그것은 2차 대전 종전 이후 소위 냉전 체제를 만들어 내고 1989년에는 그것을 허물었으며, 지금 이라크 사태를 호도하고 궁극적 아젠다 달성을 위해 이란 침공 계획을 사주하고 있는 바로 그들과 동일한 정체성을 갖고 있다.
따라서 분단과 전쟁을 두고, 미국이라는 국가에 일정 책임을 묻는 것은 타당해도, 그 궁극적 책임이 미국에 있다거나 또는 소련에 있다고 말하는 것은 부족한 정보에 기인한 불충분한 인식을 진실이라 주장하는 것이다. 아무리 교과서들이 이구동성 가르치고 주류 지식인이나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이라 해도, 부족한 실체적 규명에 의한 환상적 결론임은 변하지 않는 것이다. 전쟁을 디자인하고 조종한 것은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체제를 동시에 움직인 세력이다. 어떤 의미에서 트루만이나 스탈린조차 그들의 손에 놀아 난 하수인들에 불과한 것이다. 하물며 맥아더를 말해서 무엇 하겠는가?
그들이 누구인가는 지난 20세기의 많은 혁명과 갈등, 그리고 전쟁을 통해 지속적으로 이익을 보고 아젠다를 진전시켜 온 주체가 무엇인지를 조사하면 알게 될 것이다. 레닌의 혁명에 돈을 대어 준 자, 트로츠키를 배에 태워 돈다발과 함께 귀환 시켜 준 자, 히틀러 독일에 산업을 일으키고 재정을 지원하며 연료를 공급해 준 자, 냉전 체제의 끝없는 군비 경쟁을 부추긴 자, 베트남 전쟁을 획책한 자, 그리고 지금 아프칸, 이라크를 침공하고 이란 침공을 계획하고 있는 자, 북한을 칩으로 만지작거리며 던질 듯 안 던질 듯 위협적 자세를 취하고 있는 자들이 바로 그런 일관된 세계 지배 아젠다를 중심으로 크고 작은 갈등과 전쟁을 설계하고 작동시킨 자들이다. 그들이 진정한 수혜자들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것이 미국이냐 묻는다면, 나는 지금 아니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 아젠다가 미국을 중심축으로 실현되고 있지만, 그들은 결코 미국의 충성스런 네오콘 나부랭이들이 아니다. 그들은 지금 세계의 법과 정보 그리고 군사력을 지배하는 자본권력이다.
김일성은 무엇인가? 그는 항일 투사였으며, 소련을 배후의 힘으로 하여 북한을 공산 사회화한 사람이다. 여기까지는 별 하자 없는 일이다. 공산주의 이상이 스탈린의 소련이나 김일성의 북한에 구현되지 않은 것 자체가 공산주의라는 사상의 잘못만은 아닐 것이다. 이승만이 맥아더와 하지 등과 합작하여 친일 세력을 중용할 때, 그는 친일파를 대략 숙청하고 친소파와 항일투쟁 동지들을 규합하여 정권을 잡았다. 이승만이 미국을 이용하고 또는 조종당한 측면만큼, 김일성 역시 소련을 이용하고 또한 조종당한 인물이다.
이승만이나 김일성이나 미국과 소련이라는 스타 플레이어들의 장기판 졸들이었던 것은 마찬가지라는 말이다. 이승만이 프린스턴 대학에서 무슨 졸업 논문을 썼는지, 상해임정에서 어떤 공과가 있는지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김일성이 모스크바에서 어떤 교육을 받았고, 항일투쟁에서 일본군을 몇이나 죽였는지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모두 장기판 졸이었다는 것이다. 흑백으로 서로를 규정하고 서로 죽이려 들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전쟁을 놓고 보면 김일성의 죄가 크고, 민족주의 관점에서는 이승만의 죄가 좀 더 클 뿐이다. 일단 전쟁이 일어 난 다음 전쟁의 관성이 지배하는 상황에서, 북의 인민은 소련이란 대형의 졸인 자신들 대장 지시를 따른 것이고, 남의 국민은 또한 미국이란 대형의 졸인 자신들 대장 지시를 따라 행동한 것이다. 전쟁의 시작이 그러했듯, 전쟁의 끝인 정전협정도 미국과 소련의 뜻에 의해 이루어 진 것이다. 중공은 우정출연 한 것이고 북한과 남한은 열심히 달렸던 경주마에 불과하다.
역사는 전후 바퀴가 일체가 되어 굴러가지만, 현재 위치는 앞쪽 바퀴가 도달해 있는 지점이다. 지금 보다 중요한 것은 전쟁 이후 양쪽이 어떻게 살아 왔는가 이다. 김일성이 한 때 남한을 압도하는 경제를 유도했고, 미국이란 초 강국을 상대로 언제라도 붙을 수 있는 것처럼 패기 있게 행동한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제3세계 동맹 의장국이 된 시절도 있었다. 소련이나 중공과도 등거리 외교라는 것을 구사하며 일방적으로 놀아 나지 않으려 노력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 그 모든 것은 흘러 간 역사의 흔적에 불과하다. 북한 사회의 앞 바퀴가 도달해 있는 현 시점에선 그 모든 것이 부질없는 흘러 간 영화인 것이다.
그는 북한 사회를 폐쇄시킨 장본인이며, 자신을 신격화하고 주체사상이란 신흥 종교의 교주가 된 자이며, 망나니 아들녀석을 세습시킨 폭정의 시조일 뿐이다. 부시가 쓴 말이라 망설여 지기도 하지만, 사실은 사실이다. 만일 부시가 박정희의 유신헌법을 폭정의 바이블이라 불러도 동의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런 이유로 우리 문제에 간섭하고 왈가왈부 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이 세 가지만으로도 그는 실로 우리 민족의 앞 길에 넘기 어려운 함정을 파놓은 것과 같다. 남한 사회 역시 수 십 년 독재에 시달리고 친일반민족주의자들의 기만과 전횡에 억눌린 측면이 있다. 그러나, 최소한 남한은 북한처럼 폐쇄된 감옥 같은 사회는 아니었으며, 독재자의 조직적 신격화 작업이나 종교화된 사상을 강요하는 사회는 아니었다. 최고 권력을 휘두른 독재자들은 죽거나 감옥을 방문해야 했다. 권력 세습은 꿈도 꾸기 어려운 것이며, 다만 독재자의 자식들이 아비가 챙겨준 검은 돈으로 땀 흘리지 않은 부를 누릴 정도에 불과했다.
국가 전체가 병영화되고 감옥화 되지 않은 대신, 눈물겨운 민중의 투쟁이 있었다. 아직도 많은 부분 진행형이지만, 내세워진 정의에 진실한 정의가 숨죽여야 하는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대통령을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라고 악 쓰는 사람은 없다. 노대통령 지지자를 그런 자들로 몰아 가는 자들은 진정한 자발성과 강요된 세뇌도 구분하지 못하는 무뇌아들이다.
북한 인권 문제를 부시나 사회단체가 가르쳐 주지 않으면 모르기 때문에 매일 떠들지 않는 것이 아니다. 김정일이 어떤 인간인지 몰라서 그가 김대중 대통령과의 약속을 지키기 바라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든 외세의 개입이나 폭력적인 전쟁을 피해 형제들이 손 잡을 수 있는 길을 찾기 위해 모질게 참고 가는 것이다. 영원히 갈라 서 살 생각이라면, 할 말 못할 말 가리지 않아도 될 지 모른다. 이것은 비겁한 것과 다른 것이며, 정의에 대한 이중적 잣대와 다른 것이다.
당신의 동생이 못된 깡패라고 온 동네가 떠들어 댈 때, 당신까지 떠들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그 놈 패주고 싶어도 그러면 그 녀석이 제 온 집안 식구를 죽일 수도 있고, 내 집 식구들도 상할 수 있는 것이다. 현실을 바꾸는 과정에 무고한 민중의 피가 흐르는 일을 막기 위해, 민족이 피 흘리는 동안 다른 자들이 또 다른 수작을 꾀하는 것을 막기 위해, 모질고 험한 길을 고초와 수모를 참으며 가는 것이다. 이런 현실에서 북을 영원한 적으로 삼고 싶어 하는 인간들도 문제지만, 북이 우리보다 우월한 민족정신이나 도덕성을 갖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자들이 있다면, 그들 역시 큰 문제인 것이다.
진정한 민족주의는 사상의 뿌리에서 자라나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은 쉬 변질되어 전체주의적 희생물이 되기 십상이다. 진정한 민족주의는 서로를 믿고 신뢰할 수 있는 공동체 토양에서만 싹이 트고, 인간 사회의 보편적 상식과 보편적 정의라는 영양분으로만 옳게 성장하는 것이다. 주체사상이 무엇인지 모르고 알고 싶지도 않지만, 황장엽이나 김일성 같은 몇 명의 인간이 조작해 낸 종교화된 사상체계나 선군사상 같은 무력 우선주의가 우리 민족을 자랑스러운 민족으로 만들고 강한 민족으로 만들 수는 없다.
우리에게는 오래 된 믿음이 있다. 홍익인간의 정신이 그것이다. 모든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것은 인간에 대한 믿음이며 생명에 대한 존중이다. 인간을 믿는다는 것은 그들이 항상 모두 선함을 믿는다는 뜻은 아니다. 이해와 사랑 그리고 가르침에 의해 그렇게 변할 수 있음을 믿는다는 뜻이다. 생명을 존중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생존만 존중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 개성과 주체적 사고의 자유를 존중한다는 뜻이다. 강제된 사상은 결코 생명을 존중하는 것이 아니다. 홍익인간의 정신은 바로 그런 인간에 대한 믿음과 생명에 대한 존중이며, 인간 보편의 상식이자 정의인 것이다. 이것을 사상이라 부르든 상식이라 부르든 본성이라 부르든 아무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실천하려는 성실하고 올곧은 의지인 것이다.
맥아더!! 아들에게 남긴 기도문은 훌륭한 문장이지만 그의 창작물은 아니다. 그는 전쟁의 관성 속에서 오직 승리가 덕목이 되어 있는 시점에 미국 육사에서 배운 대로 또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한 사람이다. 전쟁의 관성에 치어 돌아가던 남쪽 국민에게는 고마운 점이 많은 사람이고 북쪽 인민들에겐 고약하기 이를 데 없는 오랑캐일 것이다. 그가 분단을 고착화 하는데 기여한 바가 크다 하여도 그는 하수인이었을 따름이며, 그것으로 크게 이익을 챙긴 자도 아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다 무엇이랴. 우리는 분단되었고, 서로 죽이며 싸웠으며, 이제 다시 그런 일이 없도록 형제로 화해하고 손 잡고 살아 갈 방도를 구해야 한다.
다시는 국제 사회 강자들의 장기판 말이 되어 대신 죽고 죽이는 일이 없어야 한다. 그렇다면 지금 그 예술적 가치도 없는 동상 하나를 놓고 죽자 사자 싸울 때인가? 아니면 역사의 왜곡된 진실을 차근차근 바로 잡고 이해를 넓혀 민족 동질성을 끌어 올리기 위해 참고 대화하며 손을 잡아야 할 때인가?
2005년9월15일 ⓒ먹물의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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