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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효기간이 지난 통조림 깡통, 신약성경

by 칠칠너래 2006. 4. 2.
등록 : cos (cosmology) 조회 : 1089  점수 : 330  날짜 : 2006년4월1일 16시08분 

난 신앙인들을 경외한다. 남의 것을 부러워해 본 적이 없었지만 독실한 신앙인의 가정에서 성장하여 체화된 믿음을 가진 친구들은 부러웠다. 상위개념에 대한 복종없이 의심만을 도구로 삼아 길을 찾는 일이 얼마나 사람을 지치게 하는지는 나와 비슷한 경험을 가진 사람이면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외국에서 떠돌다 보면 한인들이 그리워 교회문턱을 넘는 일이 생긴다. 저번 주에는 생전처음으로 성경공부 모임에 들어가 책을 한권 끝냈다. 베드로 전서를 통해서 바라본 예수는 구약에 대한 반란자였다. 그는 그에게 진리를 물어 오는 추종자들에게 명쾌히 얘기한다. "네게 천국을 보여 주겠다"고. 예수는 하늘에 있는 천국을 땅으로 끌어 내리고 억압아래에서 신음하는 모든 인간들의 궁극적인 해방을 꿈꾸었다.

그는 먼저 신앙의 속죄를 통하여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관계복원을 시도한다. 바로 자유인으로의 복귀이다. 한국 땅에서 복음을 전파하고 있는 수 많은 대형교회 목사들이 하나같이 유용하게 이용하고 있는 단어는 바로 순종일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순수한 순종의 의미를 가르쳐 주지는 않는다.

예수가 주장하는 하나님과의 관계는 모순에서 출발한다. 인간이 하나님과 관계할 수 있는 길은 단 하나, 순종이지만 그것을 통하여 인간이 노예화되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생명체가 가질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자유를 얻게된다. 인간이 오류를 저지를 수 있는 것 또 인간에게 보장된 낙원에서 신이 원하지 않는 것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인간에게 신성의 일부인 자유가 주어져 있기 때문인 것이다.

결국 예수는 신성에 포획되어 있는 신앙의 창이 아닌 우리들 속에 무한한 가능성으로 잠재되어 있는 자유의 공간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이 악행을 선택할 수도 있지만 그것마저도 허용되어 있는 인간성에 대한 고찰을 통하여 하나하나에 깃들어 있는 신성을 발견하기를 바랬다. 이것은 끊임없이 오류를 범하는 야곱을 포기하지 않고 이소안에 내재되어 있는 야수성보다는 비록 과오를 범할지라도 자유를 포용할 수 있는 자질이 있는 야곱을 사랑한 바로 동일한 하나님의 의지인 것이다.

그 자유 시민권을 부여받은 인간들이지만 이제 어두운 터널이 기다리고 있다. 예수의 시대나 그 뒤를 이은 제자들의 복음시대는 유대인들에게는 참혹한 어둠의 시대였다. 현실세계에서는 그들은 노예인 것이다. 따라서 성서 본연의 인간성, 혹은 예수가 회복시켜준 하늘나라의 시민권과는 별개로 이제 그들에게는 현실적인 선택이 기다리고 있다. 가장 밑바닥에서부터의 혁명을 준비하는 일이다.

따라서 신약에는 무수히 많은 노예의 비유가 나온다. 그것은 그들의 사회적 신분이 가져다 주는 제한적 조건하에서 자유인으로써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노예적 사유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순수한 순종적 관계의 문제와는 전혀 별도의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건 단지 그들의 처해 있던 사회적 현실에 의하여 어쩔 수 없이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현실적 방법론인 것이다.

비록 내가 신자는 아니지만 어차피 한국땅에 있는 천만 기독교인들의 실재는 부정할 수가 없는 일이다. 난 묻고 싶다. 친애하는 기독교인들은 비록 메시아가 재림하지는 않았지만 새로운 성경을 기록할 생각은 없는가?

예수가 등장하여 시대에 쳐진 구약을 개혁하여 신약을 기록했듯이 이제 이 땅위의 목회자들이 나서서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성경을 집필할 수도 있지 않을까. 분명 예수의 경우에는 그에게 부여된 임무를 고려했을 때 어느 정도의 신격화가 필요한 인물이었다. 그에게 부여된 임무는 인간과 신의 관계를 복원해내는 일이었다. 그 복원은 자유를 다시 인간에게 맡겨 둠으로써 완성되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복원은 선택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그가 속죄를 한 그 순간 바로 모든 세상의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자유의지의 재부여를 통해 이루어졌다. 그래야만 그가 부르짖은 평등이 모순되지 않는다. 이제 그 다음 세대가 해야 하는 일은 더 이상 신성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바로 현실에 대한 대처 방안의 문제로 귀착되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교회는 성경이라는 경전을 도구로 여전히 인간들을 예수의 시대에 머물기를 바란다. 노예라는 말이 가득한 성경을 들이대며 마치 노예의 삶을 살아야 구원을 받는 것처럼 묘사하며 교회의 권위를 세우는 일에 악용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의 희생을 깃점으로 그들은 얼마든지 창의적인 성경을 기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도 그 일을 하지 않는다. 이제 비록 내용적인 주권까지는 획득하지 못하였으나 형식적으로는 더 이상 우리들은 노예가 아닌 주권자이다. 노예인 자유인이 아닌 주권자인 자유인으로써 우리들을 어떻게 새로이 해석해야 할지 고민해야 할 때이다.

만약 그들이 정녕 이 사회의 시스템을 하늘의 권능을 부여받은 대리자로 생각한다면 그 사회가 선을 행할 수 있도록 각 주권자들이 올바른 권위를 행사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더이상 섬기는 신자상이 이 사회에서 선을 행할 수가 없다. 사회적 환경이 노예에서 형식적 주권자로 전이된 이상 기독교의 신자상도 심판하는 신자로 옮겨져야 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노예가 아닌 하나님이 인정한 자유인인 것이다. 예수가 나와서 목이 터져라 외치고 피를 토하며 죽은 것이 모두 인간을 해방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우리들 실상은 어떠한가. 마치 신앙이 순수한 인간성을 확보하는 보증 수표인 것처럼 이야기한다. 아니다. 자유인으로써의 인간은 그 믿음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자신을 믿어야만 인간의 존귀성으로 복원할 수 있다고 한 것이 진정 예수의 생각이라면 그는 모순된 인생을 살다간 불쌍한 영혼이 된다. 그의 희생을 모욕하지 않기 위해서는 조건없는 속죄라고 해석해야 한다. 예수에 대한 믿음과는 상관없이 모든 인간은 하나님과의 순수한 관계를 다시 복원한 것이다. 이것이 신약의 출발점이어야 한다.

다음 천국은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땅위에 존재해야 한다. 천지가 창조된 것은 천국을 위한 로드맵이지 천국으로 가는 정거장을 위함이 아니다. 이제 우리나라 교회에서는 전지한 하나님이 만능의 하나님으로 돌변해 버렸다. 개나 소나 다 기도한다. 모 하나 걸리적거리는 일만 생겨도 오 하나님 이것좀 해결해 주세요라며 애걸한다.

이것을 지양해야할 목사들은 오히려 아 저 사람이 하나님과 소통하는 것이라고 두둔한다. 한마디로 기도가 교회를 개판으로 만들고 있다. 바라는 바가 있으면 간절히 간구하는 것이 옳은 일이다. 하지만 자유인인 인간은 과연 자신이 어떤 것을 놓고 하늘과 대화할 것인지 신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기도는 이 세상을 평화롭고 살만한 천국을 만들기 위한 지혜를 하나님께 간구하는 방법이지 결코 자기 사업 번창시켜 달라고 돼지 멱따는 소리를 지껄이는 천박한 도구가 아닌 것이다.

불행하게도 우리교회는 사사로운 복을 구하는 기복신앙으로 전락했다. 이제 여기저기 서 있는 교회들은 사회의 아픈 구석을 치유하는 등불이 아닌 복을 비는 성황당이 된것이다. 따라서 목사는 박수무당이 되었다고 보면된다.

오늘날 교회가 가져야 할 가장 큰 모욕은 가진 자들 약한 자들을 탄압하는 자들이 더이상 교회를 두려워하지 않는 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다정한 친구이면 모를까. 예수가 부르짖은 복음은 당시의 위정자들에게는 두려움이었다. 그는 혁명가였고 꿈을 이루지 못하고 산화하 젊은이였지만 화이트헤드의 말처럼 그의 관념은 수세대를 거쳐 인간안에 내화되며 끝내 꿈을 이루고야 만다.

물론 아직 그 궁극적인 목표는 성취되지 않았다.

이제 신약이라는 통조림은 그 수명이 다해가고 있다. 신약이 가지고 있는 혁명성은 그 성취와 함께 빛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는 이제 새로운 복음을 구축해야 한다. 자본에 의해 억압받는 인간들을 위해 그들의 영혼에 등불이 되고 형식적인 주권을 내용적인 주권으로 전이시켜 경제 단위로 전락하고 있는 영혼들을 구해낼 정말 혁명적인 복음이 필요하다.

현재 기독교가 봉착한 가장 큰 문제는 바로 복음의 수명이 다한 것과 순수한 순종으로 인간을 복원시키지 못하는 것이다. 교회가 시대에 뒤 떨어진 노예놀이에 열중하면 할수록 기득권과 얽힌 박수무당들은 이 사회의 개혁마저 발목을 잡고 늘어진다.

오늘도 교회에 발걸음을 하는 기독신도들이여 권위는 하늘이 당신에게 부여한 자유에 있는 것이지 절대로 교회나 목사에 있지 않다. 하나님은 당신의 손으로 당신의 자유를 행사하기를 원한다. 그것을 목사에게 헌납하는 순간 당신은 하늘에 등을 돌리게 된다. 당신의 손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믿어라. 그 믿음이 없으면 그럴 자신이 없으면 오늘 교회 안가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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