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화의 뿌리는 무엇인가
에너지와 자본주의에 대한 소고(小考) (4)
“We have now sunk to a depth at which restatement of the obvious is the
first duty of intelligent men” ? George Orwell
우리 사회는 이제
자명한 일들을 다시 언급해야 하는 것이 지식인의 첫번째 사명이 될 정도로 타락하였다.
지난 번 글에서 약속드린 카스피해 연안 유전과 이란, 리비아 등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에너지 자본과 군산복합체, 미국 의회와 행정권력 등의 먹이 사슬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루겠습니다.
네 번째 이야기 - 세계화의 뿌리는 자본권력이다.
『동물농장』이나 『1984년』이란 소설을 읽지 않은 사람도 그 제목이나 내용에 대한 이야기는 들었을 것입니다.
작년에 탄생
100주년을 맞아 전 세계적 생일잔치와 제사를 받은 조지 오웰은 1903년 인도 벵갈 지방의 모티하리(Motihari)라는 곳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본명은 에릭 아서 블레어(Eric Arthur Blair)였습니다.
그가 지금 정치적 곤경에 처한 토니 블레어와 동일한 성(姓)을
갖고 있다는 것이 재미있습니다.
오웰의 아버지는 당시 영국이 벵갈 지역에서 대량으로 재배하여 주로 중국으로 수출하던
아편 무역의 교역 잔량을 관리하는 관리였습니다.
오웰의 예시적 소설과 관련하여 오늘의 지정학적(Geopolitical) 세계 정세를
논하는 것도 의미가 있겠지만, 사실 문명사적으로는 그의 아버지가 종사하였던 영국 동인도 회사(BEIC)의 아편 교역과 관련된 이야기가 훨씬 더
중요한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1950년, 46살의 나이로 사망한 오웰은 그의 길지 않은 생애 마지막 10년간 많은 에세이들과 몇 편의 삭막한 소설들을 썼지만,
그를 유명하게 만들고 경제적으로도 숨을 돌리게 만든 것은 역시 동물농장(Animal Farm)과 그가 죽기 전에 발표한 1984년(Ninteen
Eighty-Four)입니다.
그리고 이 두 소설은 모두 전체주의에 대한 풍자로 쓰여 진 것입니다.
파시즘
창궐과 히틀러의 전쟁, 그리고 스탈린의 전제 정치를 보아 온 자폐성 열등의식의 소유자였던 오웰에게 세상은 그리 낙관적인 것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 병약한 몸으로 1984년을 집필한 이유는 그의 비관적 우려(전체주의적 블록화)가 실패하고 민주적 사회주의가
구현되었으면 하는 갈망과 같은 것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는 자신을 사회주의자로 생각한 사람이지만,그의 소설은 스탈린의 전체주의에
대해 모른체하는 좌익사상가들을 괴롭히는 신랄한 공격재료가 됩니다.
1984년이 특히 미국에서 큰 성공을 거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었구요)
오웰이 런던의 요양원에서 죽은 후 54년이 지난 지금, 많은 사람들은 그의 1984년이 결국 빗나간 예언이라고 생각하며 기뻐하고
있습니다.
정확히 1984년은 아니지만, 세계는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초 사이의 5, 6년간 조지 오웰의 예언과 정반대의
현상들을 곳곳에서 경험하고 목격하게 됩니다.
이 기간 동안, 필리핀, 태국, 한국, 방글라데시, 미얀마 그리고 중국 등에서 독재 정권이나
전체주의적 정권에 대한 민중적 저항이 일어납니다.
민중은 오웰의 예언처럼 전체주의 폭력의 구둣발에 밟혀 질식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
속에 내재한 자유와 평등에 대한 갈망을 비폭력적이지만 강력한 방법으로 분출 시키며, 많은 독재자들을 자리에서 끌어 내렸던 것입니다.
물론
다 성공한 것은 아니며, 천안문과 미얀마에서는 많은 피가 흘렀습니다.
이런 아시아의 비폭력 저항은 스탈린이 세운 소련과
동유럽의 전체주의적 국가 질서에 묶여 있던 민중들에게 큰 영감으로 작용하며, 1989년 천안문 사태 이후 2년이 지나기 전에 3억 5천만 명의
유럽인들이 전체주의의 사슬을 끊고 자유로운 세상으로 뛰쳐나오게 됩니다. 단 한 방의 총성도 없이 말입니다.
1994년에는 남아연방의 인종 차별이 종식을 고하게 되고, 1998년에는 인도네시아의 철권 수하르토가 물러나며, 2000년에는
세르비아의 밀로세비치가 종말을 고합니다.
전 세계적으로 전체주의적 권력들은 일제히 수세에 몰리게 되었고, 인류 역사상 최초로 대다수
인류가 민주주의 국가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오웰의 1984년은 부분적으로 날카로운 예시력을 갖고 있었지만, 종국적으로는 기우에 불과한 것이었으며, 오히려 그의 비관
뒤에 숨어 있던 진정한 낙관적 소망, 즉 평등과 자유에 대한 갈망은 어떤 특정 문화의 속성이 아니라 인간 본연의 속성이라는 것이 증명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런 낙관적 흥분은 북한도 조만간 이 거대한 시대적 조류를 타고 스스로 벽을 허물고 나올 것으로 믿게 만들기도 합니다)
결국 세상은 인간의 본성에 의해 구원 받을 것이며, 자유와 평등은 인류 사회의 흔들릴 수 없는 보편적 가치로 굳건한
자리를 차지할 것이라는 낙관이 시대적 설득력을 얻은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런 것일까요?
정말 세계와 현대문명이라는 존재의 미래는 낙관적인 것이며, 오웰의 1984년은 유효기간이 지난 시대적
경종으로 그 역할을 끝낸 것일까요?
이 질문은 결코 현대 문명이라는 것의 속성을 놓고 벌이는 자의적이고 현학적인 지적 유희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이 질문은 지금의 세계 상황과 그 부분집합으로 존재하는 우리들에게 더할 수 없이 심각한 질문이어야 하며,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해답이 필요한 질문인 것입니다.
지난 세기 80년대 말 90년대 초 사이, 세계적 힘의 균형은 크게 바뀌었습니다.
반세기 가까운 시간, 균형을 잡아 온 두
개의 힘 가운데 하나가 스스로 해체되며, 미국은 단 하나의 “수퍼 파워”로 군림하게 되었고, 지금 그들의 일방 주의적 노선은 아프카니스탄을
초토화하고 이라크를 식민지화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다른 모든 세력들이 이 수퍼파워에 굴종하고 있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미국이
기본적으로 영어를 사용하는 국가들(미국, 캐나다, 영국, 호주)을 중심으로 하는 오웰의 오세아니아 세력이라면, 유럽은 과거 나토에서 영국을 빼고
러시아를 추가한 (또는 EU에서 영국을 빼고 신규 가입국들을 더한), 오웰의 유라시아 세력이 될 것이며, 이들은 미국을 주장으로 하는 세력과
다소 예리한 대립각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동아시아의 경우, 일본이 중국과 화해하여 ‘신 대동아 공영권’의 주니어 파트너 역을 맡을 것인지, 아니면 앵글로색슨 세력의
명예회원이 되어 오세아니아 세력의 전진기지 역할을 할 것인지 여부가 세력의 형태를 좌우할 것입니다.
일본의 국가적 속성을 고려할 때,
그들은 어느 쪽에 대해서도 명확한 태도를 보이지 않고 시간을 끌어가며 사태를 살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동아시아권의 한 축을
맡기로 작정한다면, 그들은 즉각적으로 중국과 맞먹을 수 있는 핵무장에 돌입할 것입니다.
저에게 짐작하라고 한다면, 일본은 20세기 초
그들이 영미 등과 가졌던 이해관계의 전통을 따라, 앵글로색슨의 명예회원을 택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물론 그것은 일본의 단독 결정이 아니라
오세아니아 세력의 결정이기도 한 것입니다.
중동, 중남미, 아프리카, 남동 아시아, 그리고 인도 등은 어떻게 될 것인가가 남습니다.
중동은 이미 사우디, 카타르,
UAE, 쿠웨이트, 이라크, 이스라엘 등이 미국의 보호령화 되어 있습니다.
중남미는 대략 오세아니아 세력의 시장으로 존재할 것입니다.
아프리카는 오세아니아 그룹과 유라시아 그룹의 각축장이었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남동 아시아는 오세아니아 그룹과 동아시아
그룹의 각축장입니다. 다만, 인도는 과거 그들이 제3세계의 지주적 역할을 했듯, 지금도 거의 유일하게 전세계적 동맹 관계에서 독립적 입장을 취할
수 있는 국가입니다만, 미국이 파키스탄과의 분쟁을 이용하여 자신의 영향권으로 빨아들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1948년, 오웰은 출판사에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What Nineteen Eighty-Four is really meant to do is to discuss the
implications of dividing the world up into ‘Zones of Influence’.
1984년이 진실로 의도하는 것은 세계를 ‘영향력의 구획’으로 나누는 것이 가져올 결과에 대해 논의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세계는, (비록 그것이 정확히 오웰이 논의해 보고 싶어하던 상태와는 다른 것이지만), 또 다른 “영향력의 구획”으로 나뉘어지고
있는 상황인 것입니다.
물론 이 새로운 구획은 전체주의나 민주주의 또는 사회주의 등에 의해 나뉘어 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식자층은 이것을 경제적 블록 또는 지정학적 블록(또는 지역 안보 동맹 블록)으로 부르고 있으며, 그들 가운데 다수는 마치 이러한
동맹관계가 없으면 국가적 생존이 위태로운 것처럼 호들갑을 떨기도 합니다.
하기야 인간이든 국가든 친구가 많아 나쁠 것은 없으며, 친구가
없는 외로움은 견디기 어려운 것도 사실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다극화된 세계(multi-polarized world)는, 제1차 세계 대전 20여년 전 19세기 말 힘의
균형과 본질적으로 너무나 흡사한 것이며, 에너지나 자원의 확보, 자본주의적 시장 확대 등의 인간적 탐욕이 작용하면 언제라도 파국적 충돌이 일어
날 수 있는 허약한 칸막이에 불과한 것입니다.
물론 그 당시에 비해 각 국가나 블록은 훨씬 더 강력하고 파괴적인 군비들을 갖추고 있으며,
따라서 파국이 일어 날 경우, 그 결과는 인류 전체를 훨씬 더 불평등하고 부자유스러운 환경으로 몰아 갈 것이 자명한 것도 사실일 것입니다.
여기서, 유엔이나 WTO 등은 그럼 허수아비인가 하는 질문을 새삼스럽게 할 분도 계실 것입니다.
지금 유엔은 미국의 이라크
정책에 대해 때로 반항하는 듯한 제스쳐를 보이기도 하지만, 명실상부한 미국의 집사라고 보아도 큰 무리가 없는 존재입니다.
러시아,
프랑스, 독일, 중국 등의 헤비급들만이 아니라, 수많은 약소 체급 국가들이 제각기 미국의 이라크 정책을 비판 내지 비난하지만, 유엔이 지금까지
미국이 원하는 조치를 거부했던 일은 없습니다.
오히려 유엔은 미국의 침략전쟁에 도덕적 추인을 해주는 역할을 해왔습니다.
그
이면에는 앞에 이야기한 비-오세아니아권 헤비급 국가들의 이기적 침묵이나 암묵적 동조가 있었던 것이지만, 그들의 침묵이나 동조는 기본적으로 부시의
일방 노선이 그 자체의 부당성과 도덕적 부패에 의해 좌절할 것이란 또 다른 이기적 기대를 안고 있습니다.
어차피 현 미국 행정부가 자뻑을
할 것이 뻔한데, 어느 정도 도덕적 모양새만 갖췄으면 되지, 적극적으로 나서 현재의 챔피언과 일대 일 맞짱까지 뜰 필요는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WTO는 유엔과 크게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엔이 정치적 권력들의 거래소라면 WTO는 아직 거래 대리인들은
각 국가 권력이지만, 본질적으로 자본 권력들의 거래소인 것입니다.
초국가적 자본 권력들의 입장에서, 세계 시장이라는 상권을 놓고 매번
전쟁이나 경제 봉쇄 또는 제재와 같은, 결과를 예측하기 부담스러운 조치를 취하는 것보다는, 일정한 룰을 만들어 거래의 지속성을 담보하는 것이
유리하기 때문에 만들어 진, 가장 최신 버전의 게임 틀인 것입니다.
어차피 모든 게임의 결과 돌아오는 케이크는 힘과
기술에 비례하는 것인데, 굳이 모양 사납게 부시가 이라크 다루듯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지요,
결론부터 말한다면,
지금 오세아니아권을 제외한 세계 대다수 국가들은 미국의 일방적 패권주의나 유엔을 앞장세운 신제국주의에
대해 거의 일사불란한 적대 내지 비판적 입장을 가지고 있으며, 미국의 일방적 세계 통치가 가져 올 새로운 압제와 암흑시대를 경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들이 미국과 영국이 주축이 되어 벌이고 있는 에너지 제국주의나 교조적 민주주의의 가면을 적극적으로 벗기려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이중적 태도의 표면적 이유는 다양하지만, 그 기저에 흐르는 근본 이유는 오직 자본권력의 궁극적 전략에 따르는 것, 한
가지입니다.
새로운 세계 질서의 관리자가 되고자 하는 자본권력의 전략은 미국이라는 국가의 정치권력과 그 정치권력의 충실한 하수인인 유엔이 세계
평화를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이 스스로 증명되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적절한 시점에 (세계인들이 미국의 제국주의적 속성과 군사력에 의존한
세계 평화의 영속적 보장이 불가능하며, 따라서 어떤 대안이 필요하다고 느낄 때) 그들은 WTO를 통한 자본 권력의 세계 통치(Global
Governance)를 주창하고 나설 것입니다.
그것을 주창하고 나설 자가 구체적으로 누구냐 하는 것은, 우선 지금 이미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자본 권력이 존재하는가 하는 질문을 생각해 보면 됩니다.
그리고 제가 드릴 답은 그런 권력이 존재한다는 것이며, 나아가, 이미
그들은 전 세계 정치권력을 뒤에서 육성하고 조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부시나 럼스펠트, 곤돌리자 라이스, 토니 블레어, 푸틴, 시라크 등...
소위 우리가 서구 유력 정치인들이라고 부르는 자들은
모두 일정 부분 그들의 장학금을 받고 성장하였고, 현재 그들의 마스터 플랜에 따라 종사하고 있는 장기판의 말들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황당무계합니까?
그렇습니다. 황당하기 짝이 없는 소설 같습니다.
세상에 수만 가지 음모론이 있지만, 이것보다 황당한
음모론도 드물 것입니다.
그런데 진짜 어떤 음모가 존재할 때, 그 음모를 숨기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그것을 숨기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음모가 노출되어 있을 때, 그것은 더 이상 음모가 아니라 세상 누구나 아는 설이 되며, 그 설이 황당하면 황당할수록
그 음모의 진실은 더욱 완벽하게 감춰질 수 있는 것입니다.
다만 아무나 그 설을 추궁하여 거슬러 올라가 음모의 본체까지 볼 수 있다면
곤란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으로 강력한 음모는 수많은 깃털들을 여기 저기 뿌려 놓지만, 아무나 그 털들을 보고 본체를 짐작하거나
정확히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복잡하고 거대한 규모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최적의 은폐술은 음모에 봉사하는 깃털들조차 그 본체를 모르게
하는 것이며, 자신의 행위가 그들에게 봉사하고 있는 것이란 것조차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여론 시장과 정보의 채널을 장악하고
있으며, 사회적 이슈들을 창출할 수 있는 능력을 구비하고 있다면, 그들이 그들의 전략 노출을 염려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의 전략을 의식적으로 또는 우연히 파악하게 된 자들은 침묵하거나 동조하는 두 가지 선택만을 할 수 있으며, 반항이나 공개는 어떤 형태로든
죽음과 바꾸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세계화라는 것에 대한 전세계 지성인들의 반대는 그들 각자가 이러한 상황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던, 아니면 부분적
인식에 기초한 것이든, 또는 그들이 바로 이 자본 권력에 봉사하는 역할을 맡은 깃털의 하나이든 아니면 그들과 무관한 사람이든 관계없이, 일단은
모두 포괄적 타당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자본권력(사실은 자본권력의 범주를 옛날에 벗어난 권력)이 갖고 있는 새로운 세계 질서는 몇 가지 사상적 기둥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그들은 지금 세계 인구가 지속적 발전을 담보할 수 없을 만큼 과다하다고 생각합니다. 한 10억 정도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둘째, 그들은 인간이 평등하다는 것을 헛소리라고 생각하며, 소수의 엘리트들이 인간과 사회 조직을 총체적으로
관리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그들에게, 관리 대상이 관리자와 동질의 자유를 갖는다는 것은 시스템적 에러가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상상일 뿐입니다.
탄핵 국면에서 방송에 출연하여 “국민은 Legal fiction” 일 뿐이라고 말한 이장춘 같은 자나 “누가 감히
언론을 개혁하겠다고 건방을 떠느냐”고 건방을 떤 진성호 같은 자가 바로 이러한 기둥에 붙어 있는 깃털인 것입니다.
셋째, 그들은 인간 사회도 동물의 사회와 마찬가지로 적자생존의 원칙에서 벗어 날 수 없으며, 힘없고 무능한 종들은
도태되는 것이 자연의 섭리라고 생각합니다.
조지 오웰의 1984년은 아직 완전히 실패한 예언이 아닌 것입니다.
연도는 어찌 되었든 지금 이 순간, 부시로 대변되는 미국
행정부의 네오콘들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관리하는 권력의 정체는 세계화와 궁극적 세계 정부를 꿈꾸고 있는 자본권력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이며,
이 자본권력의 뿌리가 조지오웰의 아버지가 일했던 인도 벵갈 지역의 아편 무역에서 얻은 부를 기반으로 성장했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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