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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TC[잡다한것들]/과학 읽을거리

진화론과 창조론의 결투(1)

by 칠칠너래 2005. 10. 19.
펌] 진화론과 창조론의 대결투 (1) | ♠ 과학의 세계  
출처 : 을파소의 블로그
진화론과 창조론의 대결투 (1)
스코프스 재판의 검사 윌리엄 브라이언(마이크 앞)원숭이 재판이라 불린 스코프스 재판은 라디오로 생중계되었다. 노아의 홍수 성경의 말씀에 충실한 중세시대 학자들은 산 위에서 발견되는 조개 화석들 퀴비에, 퀴비에는 화석을 진지한 과학 연구 대상으로 삼았고 화석이 멸종된 종의 것이 많음을 밝혔다.
진화론을 주장한 다윈이 생존경쟁이란 아이디어를 생각해 낸 것은 갈라파고스 섬에서의 생태계를 유심히 관찰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가장 잘 알려져 있는 곤충의 번식력을 계산한 결과이기도 하다.

그는 파리 한 마리가 한 번에 2백 개의 알을 낳는데 그것이 전부 파리가 된다면 암컷이 절반인 1백 마리라고 추정했다. 그 파리가 다시 200 개씩 알을 낳는다면 2만 마리의 파리가 되고 그 중 절반인 1만 마리의 암컷이 다시 2백 개씩의 파리를 낳는다면 단 세 번의 번식으로 무려 2백만 마리의 파리가 태어난다.

그들이 다시 알을 낳고 또 알을 낳으면 세계는 몇 년 안에 파리 천지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2백 개의 알을 낳는다 하더라도 파리가 알을 낳을 수 있는 경우는 두 세 마리에 불과하다. 다윈의 자연 도태라든가 생존경쟁이라는 이론이 나오게 된 연유이다.

진화론은 한 마디로 자연계의 수많은 생명체가 다같이 영양, 생식, 환경조건에 제약되며 상호연관되어 변하고 진화한다는 뜻이다. 더구나 생명체가 자연선택을 통해 진화한다는 진화론은 우리들에게 단순함이 어떻게 복잡함으로 바뀔 수 있는지, 어떻게 무질서한 원자들이 서로 결합하여 더욱 복잡한 형태로 바뀌고 결국은 인간까지 만들어 내게 되었는지를 매우 만족스럽게 설명해 주고 있다. 다윈이야말로 우리의 존재에 관련된 질문에 대해 이제까지 제시된 답들 중에서 유일하게 그럴듯한 답을 제공했다는 뜻이다.

<진화론자들과 창조론자들의 전투>
1925년 테네시주 데이튼 마을에서 재판 사상 유례없는 공판이 열렸다. 피고는 죤. T. 스코프스라는 고등학교 교사. 그는 성서의 천지 창조설을 가르치도록 결정된 주의 법률을 어기고 다윈의 진화론을 가르쳤다는 혐의로 고소를 당했던 것이다.

찰스 다윈이 죽은지 약 40년이 지나서 열린 이 재판은 근본적인 질문이 문제가 되고 있었다. 즉 성경에 적힌 대로 하느님이 모든 생물을 창조했는가, 아니면 비슷한 종들은 공통 조상에서 유래했다는 진화론 즉 인간은 원숭이와 동종인가였다.

테네시 주에서는 공공 교육기관 즉 학교와 대학에서는 ‘성경에서 가르치는 바, 신의 창조의 역사를 부정하고, 그 대신 인간이 저급한 동물류에서 유래한다고 주장하는 이론을 가르칠 수 없다’고 규정했다.

당시에 유럽의 대부분 교회에서 진화론을 호의적으로 보거나 적어도 감수하고 있었지만 미국의 대부분 주에서 성경의 원론적인 해석에 충실했다. 미국이 성경을 글자 그대로 인정하는 환경으로 몰아간 것은 1920년대의 새로운 문화 물결 때문이었다. 추상적인 예술이나 재즈와 같은 점잖지 못한 이단 물결이 미국을 오염시키고 있는 상황을 그대로 둘 수 없기 때문에 근본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일어서야 한다고 믿었다.

근본주의자들의 캠페인 선봉에는 세 번씩이나 대통령 후보였고 외무장관도 지낸 적이 있는 윌리엄 브라이언(1860〜1925)이 있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이야말로 다윈의 무신주의에 대한 형벌이었다고 주장했다.

24살의 생물교사인 스코프스는 사실 창조론자에 맞서기 위해 선임된 교사였다. 그는 시민권 보호를 위해 설립된 <미국시민자유연맹(ACLU)>와의 약속대로 수업 시간에 금지된 진화론을 가르치고 고발된 것이다. 그는 조지. W. 헌터의 『시민 생물학』 시간에 진화론을 강의함으로써 법을 어겼다고 인정했다.

스코프스를 변호하기 위한 세 명의 변호사 중 스타급인 클래런스 대로는 ‘진지하게 사고하는 과학자라면 그 누구도 다윈의 이론을 뒤흔들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대로의 주장은 명료했다.

’성경은 학문적인 저서가 아니라, 모두가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종교와 도덕에 관한 책이므로 국가는 어떤 해석이 옳다고 규정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테네시 주에서 지배적인 법규는 개인의 신앙⋅문학⋅학문의 자유를 위반하는 것이다.‘

이 소송에서 피고는 100불의 벌금형이라는 유죄를 선고받았다. 놀랍게도 미국의 경우 1960년대까지도 생물학 교과서에서 대부분 진화를 언급하지 않았다. 1968년 미합중국의 대법원이 반진화론 법의 위헌 판결을 내렸음에도 1969년 캘리포니아주 교육국은 다음과 같은 교육 지침을 내렸다.

‘새 교과서에는 성서의 창세기를 포함한 온갖 인류의 기원설을 실어야 한다. 또한 아동들에게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 발생의 원리', 스판테 아레니우스의 '판스페르미야설' 등을 가르치는 것을 허용한다.’

창조론자들은 진화론과 동등한 자격으로 창조론을 학문으로 가르치도록 하는 법을 입법화해야 한다고 압력을 가했다. 그러나 1987년 대법원은 헌법에 규정한 국가와 교회의 분리를 들어 이 법 역시 폐지했다.

그런데 미국에서 다른 나라와는 달리 진화론이 창조론자들의 기세에도 불구하고 자리매김하기 시작한 것은 창조론자이 관련 재판에서 여러 번 패배했기 때문이 아니다. 학자들은 구 소련에서 1957년 인류 최초로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를 발사하고 우주 탐사 경쟁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대다수의 교육자들이 미국이 우주 탐사 경쟁에서 소련에게 진 이유는 학교에서 과학과 과 기술 교육을 소홀히 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곧바로 꼼꼼하게 교과서들을 검토하는 작업이 이루어졌고 생물학에서 진화론이 확고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래도 성서의 단어 하나하나를 진실로 믿는 사람들은 이와 같은 변화에 곧바로 반발하기 시작했다. 우선 미국 정부가 교실에서 종교를 가르치는 것을 금지하자 창조론자들은 전술을 바꾸었다. 그들은 과학을 공격하는 대신 과학의 일부에서 틈새를 찾기 시작했다.

많은 신학자들이 창조 과학이라는 개념을 도출했다. 이 새로운 과학 개념은 진화론이 단지 자연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해석해 놓은 수많은 방식들 중 하나에 불과하며 그들이 주장하는 것 중에서 많은 것이 사실이 아니라 가설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구약성서를 유일한 원전으로 삼아 나름대로 지구의 생명이 시작된 과정을 설명했다. 당연히 창조과학도 과학이므로 과학 시간에 창조이야기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가장 집착한 것은 교사들이 다윈의 진화론을 ‘이론’ 그 이상은 아니라고 명확하게 꼬리표를 붙인 상태에서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1995년 앨라배마의 교과서는 진화는 ‘사실로 인정되어서는 안 되는 이론의 여지가 많은 이론’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스티커를 첨부했다. 루이지애나와 애리조나의 교사들은 다윈의 이론에 대한 경고를 읽어줄 의무가 있을 정도이다. 캔자스 주에서 40년을 봉직한 교사가 해고되었는데 이뉴는 그가 창조론을 비학문적이라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진화론과 창조론의 대결투는 1990년대 말 캔자스 주 교육위원회의 위원들이 과학교육정책을 수정하기로 결정했을 때 절정에 달했다. 학생들이 진화에 관한 부분에서 시험을 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인데 이것은 학생들이 시험에 나오지 않는 부분을 공부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시험에 나오지 않는 내용을 교사들이 학생에게 가르칠 리는 만무한 일이다.

캔자스 주의 학교에서 진화론을 가르치지 않는다고 하자 전국에서 격렬한 항의가 일어났다. 각 주의 대학 교수들은 캔자스 주 고등학교 학생들은 과학 지식이 심각하게 결여되어 있을 것이므로 대학에 입학할 자격이 안 된다고 선언했고 과학 단체들은 캔자스 주에서는 학회를 개최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결국 이 사건은 주민들의 투표를 통해 다시 번복되었다. 1년도 지나지 않아 이루어진 교육위원회 선거에서 보수적인 기독교인 네 명 중 세 명이 교육위원회에서 밀려났고 캔자스 주에서 진화론에 대한 교육을 금지하는 규정은 폐지되었다.

이와 같이 진화론자와 창조론자들의 대결투가 일어나게 된 요인은 각 측이 나름대로의 주장을 펼 수 있는 필요충분조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대해 4회에 걸쳐 설명한다.

<진화론의 탄생지 갈라파고스섬>
찰스 다윈은 1809년2월12일 에브라함 링컨(1809-1865)과 똑같은 날에 의사인 아버지 로버트 다윈과 웨지우드 도자기로 유명한 부유한 웨지우드 가문의 수잔나와의 둘째 아들로 슈롭셔의 슈루즈베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5대에 걸쳐 왕립과학자협회 회원을 배출했으며 의사였다. 다윈 집안 자체가 진화와 유전을 배울 수 있는 혜택 받은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지만 다윈은 이른바 우등생 타입의 학생은 아니었다. 식물이나 곤충을 모으는 일에는 열심이었지만 학교에서 가르치는 그리스어나 라틴 어의 작문 등에는 전혀 흥미를 나타내지 않았으므로 학창시절 가족이나 학교 선생님들로부터 그다지 인상적이지는 못했다.

새뮤얼 버틀러 고등학교의 그에 대한 소견서에는 󰡐아주 평범한 학생으로 성적은 평균에 약간 못 미침󰡑이라고 적혀 있어 그가 매우 평범한 학생임을 알려준다. 유명한 의사였던 아버지도 '너는 사냥이나 개 기르기, 쥐 잡기말고는 아무것도 관심이 없으니 네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 집안에도 불명예스런 존재가 될 것이다.'라고 심하게 꾸짖어 다윈의 머리에 잊지 못할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이 말은 부모가 자식에게 한 최악의 예언 중에서는 최상위에 꼽힐 것이라고 존 더랜트는 적었다. 아무 쓸모가 없다고 생각되던 찰스 다윈이 아버지 로버트 다윈보다 훨씬 성공하였고 시인이자 발명가로 유명한 그의 할아버지 에라스무스 다윈(Erasmus Earwin, 1731~1802)보다도 훨씬 유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성공은 오히려 어려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기 때문에 이루었는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권유로 에딘버러 의과대학에 들어갔으나 의사는 담력이 약한 그에게 적성이 맞지 않았다. 당시에는 수술할 때 고통을 덜어 주는 마취제가 개발되지 않았기 때문에 환자를 수술대에 묶은 후 그대로 수술했다. 수술할 때 대부분 환자들이 통증을 참지 못하여 비명을 질렀다. 다윈은 어린아이를 수술하는 광경을 보다가 수술실을 뛰쳐나간 후 결국 의학 공부를 포기한다.

아버지는 대를 이어 의사로 다윈을 만들겠다는 생각을 포기하고 목사로 만들기 위해 케임브리지의 크라이스트 대학의 신학부로 보낸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흥미를 잃고 박물학에만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이 시대의 유럽은 󰡐철학적자연학󰡑이 매우 각광을 받았는데 이 학문은 철학과는 상관없이 생존하거나 멸종한 식물과 동물을 대상으로 그들의 본성과 기원, 상호관계를 밝히는 학문이었다. 철학적자연학은 복잡한 실험기구들이 많은 물리나 화학분야가 아니라 예리한 눈, 활발한 상상력과 논리적 사고력에 많이 의존하므로 다윈과 같이 집안이 좋고 다소 나약한 성질의 남자에게는 적격인 분야였다.

다윈은 당시의 유복한 자제의 전형대로 수집에 열중했는데 그는 딱정벌레류 수집에 열중했다. 특히 19세기 독일의 유명한 자연학자인 알렌산더 폰 훔볼트(Alexander von Humboldt)의 영향을 받아 󰡐자연과학이라는 고귀한 건축물에 하나의 돌멩이라도 더해보려는 불타는 정열󰡑을 키우고 있었다고 술회했다.

이때 그의 인생을 결정적으로 바꾸어줄 사건이 생긴다. 영국 정부는 정밀한 신형 시계를 검증하고 해군이 사용하는 남아메리카의 해안선 지도를 개량하기 위해 해군탐사선 비글호(HMS Beagle)에게 세계 일주 항해를 명령했다. 비글 호는 수많은 해안과 항구를 조사해야 하므로 당시 27세인 비글호의 선장인 피초로이는 해양탐험에 동승할 박물학자를 찾았다.

케임브리지대학교의 성직자이자 식물학 교수인 헨슬로우는 다윈을 그 자리에 추천했다. 다윈의 아버지는 항해는 위험할뿐더러 다윈의 경력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반대를 했으나 외삼촌인 조셉 웨지우드의 도움으로 다윈의 나이 22살 때 5년 간 무보수 박물학자로 해군 측량선 비글호를 타게 된다.

1831~1836년에 걸쳐 비글호를 타고 세계 각지를 여행하던 다윈은 1835년에 갈라파고스 제도에 가게 된다. 동태평양상에 떠있는 13개의 큰 섬과 여러 개의 작은 섬을 16세기(1532년)에 방문한 스페인 사람들은 스페인어로 󰡐거북󰡑을 뜻하는 갈라파고스 제도라고 불렀다. 총 면적이 8000제곱킬로미터이며 남아메리카 에콰도르 해안선으로부터 약 1000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그 가운데 이사벨라 섬이 약 6000 제곱킬로미터를 차지하고 있다. 한류인 페루해류가 흐르는 곳에 있기 때문에 바닷물의 온도가 15도로 낮고 기온도 낮아서 해안 가까이의 연평균 기온이 25도이며 연간 강우량은 1000밀리미터다.

그곳은 곤충과 포유류가 적은 반면에 파충류와 조류의 천국이었다. 놀라운 것은 갈라파고스 제도의 생물들은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있는 것에 비해 매우 달랐다. 파충류와 조류뿐만 아니라 곤충, 꽃 등도 마찬가지였다. 이를테면 다윈이 잡은 15종의 물고기 전부와 16종의 육생 패류 중에서 15종이 신종이었다. 그야말로 갈라파고스 제도는 종의 보고였다.

다윈이 놀란 것은 이들 생물들이 멀리 1000킬로미터나 떨어진 남아메리카의 태평양 연안의 생물과 어딘가 다르다는 점이다. 그곳에는 등껍질 직경이 2미터가 넘는 거대한 거북이 있었는데 이들은 선인장 같은 식물을 먹고 살았으며 다윈이 등에 올라타도 아무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비글호가 갈라파고스 제도로 출발하기 전에 갈라파고스 제도의 코끼리거북이 섬에 따라 약간씩 다르다는 것을 산타마리아 섬의 부지사인 니콜라스 로슨이 이야기했다. 그는 다윈에게 말했다.

"이 제도에는 닮은 거북이 많이 있지만 나는 어느 거북이 어느 섬의 것인지 등껍질 무늬만 보고도 금방 분별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어떤 섬의 거북은 그 등딱지가 앞쪽으로 들려져 있었고, 다른 섬의 거북은 등딱지가 보다 둥글고 검은빛을 띠고 있었다. 다윈은 '이들 섬은 서로 수백 킬로미터 정도 밖에 떨어져 있지 않고 또 섬의 모습이나 기후도 비슷한데 그곳에 사는 동물에게 이와 같은 미세한 차이가 생긴 것은 어떤 이유일까?'라는 의문을 품게 되었다.

바다이구아나는 갈라파고스 제도에서만 산다. 겉보기와는 달리 매우 온순한 동물이며 먹는 시간 이외에는 대부분의 시간을 따사로운 햇볕을 쐬며 보낸다. 헤엄에 능숙함에도 결코 다른 섬으로 가는 일이 없다. 이러한 이유에서 다른 섬의 바다이구아나와 섞일 기회는 거의 없다. 그래서 코끼리거북과 마찬가지로 섬에 따라 약간씩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그가 진화론을 생각하게 만든 경정적인 계기는 13종의 핀치(Finch, 검은방울새 또는 다윈 방울새) 때문이다. 그들은 기본적으로는 닮아 있었지만 그 형태난 깃털에 기묘한 차이가 있다. 그것은 먹이의 차이에 의해 생긴 것 같았다. 곤충만 먹는 것, 곤충 외에 식물도 조금은 먹는 것, 식물을 주로 먹는 것, 식물 외에 곤충도 조금 먹는 것이다.

이 가운데 이를테면 대형 갈라파고스핀치는 단단한 종자를 깨기에 적합한 크고 튼튼한 부리를 가지고 있다. 종자 외에 어떤 종류의 곤충과 꽃과 열매도 먹는다. 그들은 큰 종자를 먹을 수 있기 때문에 소형 갈라파고스핀치 등과 먹이를 놓고 다투는 일이 없다. 딱따구리핀치는 딱따구리와 닮았다. 그러나 딱따구리처럼 긴 혀가 없기 때문에, 애써서 나무에 구멍을 뚫어도 구멍에서 곤충을 꺼낼 수가 없다. 그래서 선인장의 가시를 도구로 사용하여 곤충을 꺼내는 것을 터득하였다.

어느 날 다윈은 채찍을 가진 한 소년이 샘 가장자리에 앉아서 물을 마시러 온 새를 그 채찍으로 때려서 땅에 떨어트리고 있었다. 소년의 발 밑에는 그의 저녁 식사를 위한 작은 새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다윈 자신도 모자를 가지고 한 마리를 떨어트려 봤다고 했다. 다윈은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인간이 거의 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인간으로부터 심한 고통을 당하는 일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들은 인간이 거북이나 이구아나보다 위험한 존재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그들을 사로잡거나 총을 쏘거나 하면 마침내 그들도 인간을 두려워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것이 다윈의 진화론을 구상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자신이 항해에서 얻은 경험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나는 박물학자로서 비글호에 탑승했을 때 남미의 생물 분포와 과거에 남미에 존재했던 생물과 지금의 생물과의 지질학적 관계에 몹시 놀랐다. 이런 사실들이 종의 기원에 대해 어떤 빛을 던져주는 듯 보였다. 어떤 위대한 철학자의 말마따나 종의 기원은 신비 중의 신비였다. 1837년 영국으로 귀향하는 도중 그것과 관련된 모든 종류의 사실들을 끈질기게 모으고 숙고한다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무언가가 나올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석의 고민>
고대인들에게 화석은 그야말로 골치거리였다. 산 정상에서 조개나 물고기 화석이 나오기도 하며 인간이 살지 않는 사막에서도 화석들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화석은 생물의 유해가 돌처럼 굳어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을 많은 학자들이 알고 있었지만 일반 사람들이 이를 부정했다. 화석은 동식물의 유해가 아니라, 우연히 생물체의 모양을 닮은 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질학자들이 신이 지구를 창조하던 날 조개나 물고기를 바위 속에 박아 넣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하자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뭉친 중세 유럽에서는 ‘과학은 신학의 시녀’라는 표현에 걸맞게 화석도 ‘성경의 말씀’에 적합한 설명으로 풀이했다. 즉 산에서 발견된 조개의 화석은 노아의 홍수 때 산까지 떠밀려간 조개들이 죽어서 남은 것이라고 해석했다. 또한 이미 멸종되고 없는 기이한 동물들의 화석은 ‘하느님이 흙으로 빚어서 창조하려다가 실수로 생명을 불어넣는 것을 잊어서 그렇게 된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이 글을 작성하는데 많은 사람의 글을 인용 또는 발췌하였지만 일일이 저자의 이름을 거론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특별히 밥 킬머와 로이스 그레시의 글이 많이 인용됐음을 밝힌다.

여기에 과학자들이 종교인들의 이러한 무지를 곧바로 공격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가장 중요한 논거는 예를 들어 조개 화석 등이 여러 층에서 발견되는데 그렇다면 노아의 홍수가 두 번 이상 있었느냐는 질문이다.

르네상스 시대이래 천재 중에 천재라고 알려진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이탈리아 롬바르디 산 정상에서 화석과 조개 껍데기를 발견하자 산 위에 있는 화석이 성경에 나오는 홍수 때문이라는 당시의 보편적인 견해에 단호히 도전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가 적은 글을 보면 그가 왜 천재인지를 알 수 있다.

'이 과정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높은 산에서 발견되는 조개껍질은 대홍수에 의해 옮겨지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우선 대홍수가 폭우에 의해서인지, 바다의 범람에 의해서 발생된 것인지를 조사해야 하며 폭우나 바다의 범람이 아닌 다른 이유에 의해 조개껍질이 높은 산까지 운반되었는지도 고려해 봐야 한다. 내가 발견한 조개껍질은 네 가지 종류가 있는데 이것으로 보아 이들은 각기 다른 시대에 만들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수백 마일 떨어진 바다로부터 조개껍질을 옮겨다 놓은 것은 대홍수 작용이 아니며 노아의 홍수는 지구 전역에 걸쳐 일어나지 않은 것 같다고 적었다. 성경책에는 40일간의 대홍수가 발생하여 가장 높은 산보다 약 5미터 정도 높을 정도로 비가 내렸다면 지구 표면이 모두 물로 뒤덮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수면은 지구의 중심으로부터 모두 같은 거리에 있었을 것이며 이런 상황에서는 물의 흐름은 있을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물이 움직이지도 않은 상태에서 범람이 있을 수 있으며 높은 산에서 화석이 발견될 수 있느냐고 의아심을 품었다.

여하튼 1700년대 말이 되자 지질학자들은 노아의 홍수에 의해 화석이 만들어졌다는 종교인들의 주장을 철회시키는데 성공했고 프랑스의 조르주 퀴비에(Georges Cuvier, 고생물학자이자 비교해부학의 창시자)는 화석이 멸종된 종의 것인 경우가 많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사는 세상 이전에 딴 세상이 있었고 그것이 어떤 대재앙으로 파괴되었음을 증명한다. 그러면 옛날의 지구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인간이 지배하지 않던 세상은 어떠했을까? 어떤 일로 옛날의 세상은 반쯤 썩은 뼈밖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못할 정도로 철저히 파괴되었을까?”

퀴비에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매머드와 기타 포유류를 멸종시킨 사건은 한 번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여러 번 일어났다는 것도 발견했다. 그는 노아의 홍수가 사실이었다면 이는 무수한 천재지변 중 가장 최근의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 이전의 천재지변도 매번 수많은 종을 멸종시켰으며 이러한 사건은 인간이 태어나기 훨씬 이전부터 진행되고 있었다고 말했다.

여하튼 다윈은 항해기간 동안 엄청난 화석을 발견했지만 뼈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는 몰랐다. 그는 자신이 발견한 화석들을 모두 영국으로 보냈다. 그 당시만 해도 다윈은 단순한 화석수집가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자신이 발견한 화석에 의심을 품었다. 퀴비에의 추종자이던 다윈은 대홍수 이전에 거대한 괴물들이 살았고 이들은 멸종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신이 발견한 뼈는 오늘날 아르헨티나 해변에서 살고 있는 조개류와 거의 똑같은 조개의 화석과 섞여있었다. 화석이 발견된 바위를 보아도 뼈의 주인공이 그렇게 오래된 것 같지는 않았다.

다윈의 눈에 지구는 변하지 않은 것 같지만 생명의 역사가 순탄하지 않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었다. 다윈은 적어도 수백만 년 단위로 지구를 바라보는 눈을 갖기 시작했다. 이러한 시각에서 보면 지구는 여기저기 융기하고 다른 곳은 무너져 내리고 표면이 마구 갈라지고 터지는 곳이었다. 이것은 바로 생명이 어떻게 변화해 가는 지에 대한 의문을 다윈에게 남겨 주었다.




이종호 과학국가박사 mystery123@kore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