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ETC[잡다한것들]/etc(잡동사니들)

옛 왕들의 화장실 문화는 어땠을까요?

by 칠칠너래 2005. 10. 27.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어디나 있는 화장실이 궁 안에도 물론 있을 것이다. 궁 안에 있는 화장실은 서각(西閣), 혼헌(渾軒)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그러나 임금이나 왕비가 지내는 곳에는 화장실이 없었다. 그러면 임금이나 왕비는 어떻게 일을 보았을까? 바로 이동식 좌변기인 매회(煤灰)틀이라는 것을 이용했다.

 

이 나무로 만든 매회틀 위에 앉아서 일을 보는데, 매회틀 속에는 사기나 청동으로 만든 그릇이 있어서 서랍처럼 밀어 넣거나 뺄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이 그릇 안에는 재(灰)를 듬뿍 담아 놓았다. 재(매회)위에 용변을 보면 소리도 나지 않고 냄새도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용무가 끝나면 나인이 밑을 씻겨주고, 변을 본 그릇은 깨끗이 씻은 다음 다시 끼워 넣도록 되어있다.

 

더러는 임금이나 왕비의 대변은 왕실 의료 기관인 내의원으로 가져가 의원들이 임금과 왕비의 건강 상태를 확인했다고 한다.

 

그러면 무엇으로 닦았을까? 두루마리 화장지? 그러나 이것은 정확한 자료가 없다. 추측컨데 오래된 무명천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알 수 없는 일이다.

왕은 화장실을 가지 않는다?

근심을 푸는 곳…. '해우소(解憂所)'. 아무리 풍족하게 잘 먹었어도 이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정말 난감하죠? 여러분도 이와 얽힌 웃지 못할 사연들이 하나쯤은 있을 겁니다. 그런데 과연 옛날 왕들은 화장실을 갔을까요?


설마, 왕도 인간인데 어떻게든 배설은 하고 살았을 것 아닙니까. 왕의 편전에는 화장실이 따로 없었다는 군요. 왜냐하면 매화틀이라는 나무로 만들어진 간이 화장실이 있었기 때문이죠.


매화틀은 이동할 수 있는 간이 화장실로 쭈구리고 걸터 앉아 용변을 보는데 틀 속에는 서랍이 있어 그 속에 재를 깔아 놔 소리가 나지 않도록 했답니다.


매화틀은 세쪽은 막히고 한쪽은 터져 있는 의자식 좌변기로 뒤처리는 '복이 나인'이라는 신하가 도와주었다는군요.

 

왕의 용변이 끝나면 복이 나인이 밑을 씻겨주고 변을 본 그릇을 빼내어 깨끗이 씻어서 다시 끼워 넣었다고 하니 참, 별의별 직업도 다 있군요.
그 신하는 얼마나 괴로웠을까요?


그래도 왕이기 때문에 그것도 영광으로 알고 최선을 다해 자신의 임무에 충실했겠죠?


그밖에도 매화틀은 필요할 때 내의원으로 가져가 왕의 용변을 검사해 왕의 건강을 점검하는 자료로 삼기도 했답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나라 좌변기의 역사도 꽤 오래된 셈이군요.
궁궐엔 화장실이 없었냐구요? 아니예요. 경북궁의 경우 화장실이 28곳이나 있다고 해요.

 

신분사회라 신분이 높을수록 자기 일을 제 손으로 하지 않았을 시대이니 당연히 왕의 뒷일은 신하들이 도와줄 만 했겠군요.


음---옷에 대한 글은 없었는데, 예전에 재가 고궁에 대한 프로에서 왕의 화장실에 대한 내용을 봤는데 신하가 치마를 들고 있어도 될 만큼 작은 휴식처같은 곳이었어요.

 

제 기억으로는 나무 바닥으로 된 마루같은 곳에 의자가 있었는데 의자의 구멍으로 볼 일을 봤죠.(양변기처럼)


비녀같은 장식이 떨어져도 푸세식 화장실 같은 곳이 아니어서 줏으면 됐을 거예요.


그래도 여왕이 스스로 치마는 들었겠죠? ^^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면 좋겠네요. 좋은 하루 되세요~*

내용출처 : http://www.papermagic.co.kr/culture_4.asp#8
 kukjinee  |

매회틀이 아니고 매화(梅花)틀, 대변이 매회꽃 처럼 생겼다는 설도 있고,

임금의 무엇은 항상 올려부르다가 그렇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

 

오줌은 매우(梅雨)라고 했다.


재를 깔았다고도 하나 볏짚으로 된 여물을 깔았다.


중국의 부자 상앙은 여물 대신 파리날개를 썼다고 하는데

파리 날개 한주먹이면 몇마리를 잡아야 할까.


뒷처리는 휴지대신에 명주 천을 썼다고 한다.


매화틀 담당 상궁을 매화상궁이라고 하는데 매화상궁의 부수입이

바로 남는 명주천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