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에 대하여..
샤트 알 아랍 수로(水路) (Shatt al Arabs Waterway)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가 끼고 흐르는 바그다드, 그리고 이 강들의 유역은 6, 7천년 전 수메르 그리고 바빌론이 숨쉬고 약동하던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요람입니다. 이 두 개의 유서 깊은 강은 현재 이라크의 알 쿠르나(Al Qurrnah)라는 곳에서 합쳐져 흐르게 됩니다. 여기서부터 남쪽으로 페르시아만에 흘러 들어가는 곳까지의 약 200km에 달하는 수로를 아랍어로는 Shatt-al-Arab(Stream of Arabs)라고 부릅니다. 이 수로 양쪽에는 이라크와 이란의 중요한 항구가 각각 두 개씩 있습니다. 이라크의 바스라와 움 카스르(Umm Qasr), 그리고 이란의 코람샤와 아바단이 그것들입니다. 수로의 남단 약 130km 정도가 양국 국경을 구성하는, 우리의 임진강과 비슷합니다..
(지도 올리려 했는데 잘 안되어 삭제했슴다)
원래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는 이 수로보다 훨씬 서쪽에서 페르시아만에 진입했었다고 합니다. 생긴지도 얼마 되지 않고, 좁은 곳은 40m 정도 넓어야 800m 정도의 폭을 갖고 있는 이 수로는 이란 쪽에서 흘러 들어오는 카룬 강의 퇴적작용으로 늘 준설을 해야만 배가 지나다닐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러나 이곳은 현재 이란과 이라크의 전신인 페르시아와 오토만 제국이 1639년 수로 이용권에 대한 평화협정을 체결한 이래 늘 양측의 분쟁을 유발해 온 악명 높은 곳입니다. 후세인이 1980년 이 수로의 독점적 영유권을 주장하며 이란을 침공하여 발발된 이란-이라크 8년 전쟁은 그 도발의 원인도 수로였지만 양쪽의 헤아릴 수 없는 살육전도 바로 이곳에서 전개되었습니다.
이란을 이야기하려는 시점에 웬 물길(水路) 이야기인가 하시겠지만, 나름의 소회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란/이라크의 8년 전쟁이 한창이던 80년대 중반, 저는 호르무즈 해협의 방파제에 서서 대기 중인 거대한 유조선들의 불빛을 보며 깊은 회의에 잠겼던 일이 있습니다. 과연 이곳 호르무즈와 북쪽의 샤트 알 아랍이 이란과 이라크, 아니 중동 산유국 석유의 대부분이 드나드는 출구가 아니었다면, 그래도 저 별 볼일 없어 보이는 수로 주변에 젊은이들의 시체가 산을 쌓았을 것인지??
영국과 미국의 석유 메이저들과 그들에 조종 당하는 정치권력의 야욕이 아니라면 양국의 젊은이들이 8년씩이나 서로 죽고 죽이는 살상의 어리석음에 빠지지는 않았을 것이란 확신은 사실 지금도 떨칠 수 없습니다. 아니, 20년이 지난 지금 이 순간에도 그들의 야욕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고 오히려 더욱 간악하고 잔인하게 표출되고 있습니다. 이제 그들은 아프칸과 이라크에 뿌려진 피만으로도 만족하지 못하여, 오랜 숙적 이란의 피를 보고 싶어 합니다.
이란은 무엇이 문제인가?
알렉산더가 잠깐, 징기스칸의 몽고가 잠시 짓밟았다 해도, 이란은 서쪽으로 그리스 동쪽으로 지금의 파키스탄까지 지배했던 제국의 후예들입니다. 현재 이슬람 신정(神政, theocracy) 체제를 유지하고 있지만, 그들은 인종적으로나 민족적으로 아랍이 아닙니다. 이란이란 말이 아마 아리안의 후예란 뜻일 것입니다. 페르시아는 바빌론과는 또 다른 문명의 한 요람이며 누구에게도 지고 싶지 않은 역사와 문화를 자랑하는 민족입니다.
문제는, 지금 또 다시 그들의 지정학적 위치와 자원으로 인해 영국과 미국으로 대표되는 앵글로 자본주의 제국의 사냥감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사무엘 헌팅튼 같은 자는 이란도 포함해서 문명의 충돌이라 할지 모르지만, 이란은 독자적 문명 세계에 속한 국가이며, 문명의 충돌과는 전혀 상관없는 약탈의 제물이 될 수 있는 위험에 처해 있을 뿐입니다. 이란이 뭘 잘했다는 이야기보다, 미국이나 영국이 몰아가는 세계가 너무나 잘못된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란의 20세기는 에너지 제국주의가 무엇인지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역사입니다. 현재 이란 핵 문제를 안보리에 회부하려는 움직임의 원인과 정확한 맥락 역시 지난 세기 역사의 연장선에서 생각할 때 올바로 이해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요약한다 해도 한 자리에서 모두 설명 드릴 능력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선 지난 세기 이란의 역사 가운데 AJAX 작전 (Operation Azali, 공식 작전명- TP AJAX)이란 것을 화두로 잡아 이야기를 나눠 보도록 하지요.
오퍼레이션 에이잭스 또는 트로이 전쟁
아약스 또는 에이잭스 작전은, 1953년 8월 영국과 미국의 첩보기관들이 합작하여 닥터 모하메드 모사데그(Mohammed Mossadegh) 총리의 이란 민주 정권을 쿠데타로 전복시키고, 모하메드 레자 샤 팔레비(Mohammad Reza Shah Pahlavi)를 이란의 명실상부한 왕으로 복권시킨 비밀 작전 입니다. 아약스(Ajax)는 히딩크가 이끌고 있는 페에스베(PSV)의 오랜 라이벌인 암스텔담 축구클럽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축구클럽이든 비밀 작전이든, 그것은 트로이를 공격한 그리스 용사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CIA와 영국 MI6의 눈에는 당시 이란 민간 정부가 트로이고 자신들은 그것을 공격하는 ‘영웅적 용사들이다’ 라는 의식이 담겨있는 작전명입니다. 그렇다면, 이 본드 스타일 영웅들에게 트로이의 헬렌 같은 존재는 무엇이었을까요? 세계 매장량의 10%에 달하는 이란의 석유 말고 무엇이었겠습니까? (당시는 10%가 아니라 아마 30% 정도로 인식되었을 것입니다.)
이란 석유는 이미 오래 전부터 앵글로 페르시안 석유회사 또는 앵글로 이란 석유 회사란 이름으로 영국의 품에 깊이 안겼던 미녀였는데, 이란이 돌연 더 많은 로열티를 내지 않는다면 되찾아 가겠다고 한 것입니다. 영국은 로열티도 더 못 주겠다 헬렌도 못 찾아간다 버텼고, 이란 의회는 1951년 3월 15일 이란 석유산업의 국유화와 영국이 소유하고 경영하던 앵글로 이란 석유회사(Anglo Iranian Oil Company-AIOC)를 접수하는 법안을 통과시킵니다.
그 일 주일 전, 기술적 이유로 석유 국유화를 반대하던 장군출신 국무총리는 2차 대전 후 이란에 군림하는 외세를 축출하자는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의 일원에게 암살되었습니다. 이란 의회는 그 다음 달 79 대 12 라는 압도적 다수로 닥터 모사데그를 총리를 지명했으며, 젊은 왕 팔레비는 모사데그의 인기를 감안할 때 그의 총리지명을 재가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총리 자리에 오르자 모사데그는 곧 의회가 통과시킨 법률을 실천에 옮겨 석유 산업을 국유화하고 AIOC를 접수해 버렸습니다.
이렇게 과감하게, 오래 전 빼앗기다시피 팔려 간 헬렌을 대영제국으로부터 되찾아 온 패리스 즉 이란의 민족진영과 모사데그가 믿는 것은 국내 여론이나 이슬람 지도자들의 지지만은 아니었습니다. 이란 북쪽의 아제르바이잔이나 쿠르드족을 교두보 삼아 이란으로 팽창해 들어오고 싶어 하는 스탈린 공산주의를 경계하는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어느 정도 영국을 견제해 주길 내심 기대했을 수 있습니다. 사실 영국이 이란 석유를 독식하고 있는 것을 미국 또는 미국의 메이저들이 꼭 달가워했을 까닭이 없기에 이란의 기대가 근거 없는 짝 사랑이었다고 하기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부분에 당시 이란 좌파 민족주의자나 이슬람 지도자들의 안이한 상황 판단과 대책 없음이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어쨌든 처칠이 이끌던 당시 영국 정부는 즉각 헬렌 구출 작전에 돌입합니다. 당장이라도 함포를 쏘아 갈기며 들어가 엎어 버리고 싶었겠지만, 남의 눈, 특히 소련과 미국의 눈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어, 두 가지 작전을 동시에 구사합니다. 하나는 트로이 봉쇄 작전이고 다른 하나는 미국을 설득해 협력을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첫 번째 작전이 바로 앞에 기술한 샤트 알 아랍의 이란 항구 아바단을 대영제국 함대가 봉쇄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아바단 사태(Abadan Crisis)
영국은 자신들 자산이라고 생각하는 아바단 정유 시설에서 나오는 석유 제품의 수출만 봉쇄했던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이란의 모든 원유 수출까지 봉쇄한 것입니다. 설사 그렇지 않았다 해도 당시 이란 석유 제품 모두가 거의 영국을 시장으로 하고 있었으니, 이란으로선 당장 연 1억불 이상의 수입원과 시장이 사라진 것이 되었습니다. 당시 이란 경제에서 이것은 엄청난 비중이었습니다. 석유산업이 하루 아침에 수입은커녕 매달 천 만불 가까운 적자를 야기하는 상황으로 바뀐 것입니다.
이란의 돌발적 경제난은 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치명적 경제 난국에도 불구하고, 이란 국민들은 여전히 모사데그를 지지했습니다. 의회 역시 1952년 모사데그의 연임을 승인합니다. 상황을 해소하기 위해 그는 여러 특단의 조치들이 불가피함을 느끼고, 왕에게 필요한 권한과 자신의 개혁을 위협할 수 있는 군부 통제권을 요구합니다. 이 요구를 젊은 샤 팔레비가 거절하고, 모사데그는 즉시 사임합니다.
그런데 후임총리가 취임 일성으로 영국과 재협상할 뜻을 밝혔고, 그러자 이란 전역에서 치열한 반대 시위가 일어납니다. 2차 대전 이후(사실은 20세기 초부터), 이란석유에 눈독을 드리고 입맛을 다시는 전승국들의 오만 때문에, 반사적으로 이란 민족주의 정치세력이나 좌파 사회주의 이념이 크게 고양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여튼 민중의 거센 반발에 놀란 샤는 즉각 총리를 해임하고 다시 모사데그를 불러 총리에 임명합니다. 더불어 그가 요구했던 앞에 말한 권한들도 허용합니다.
힘을 얻은 모사데그는 일종의 토지 개혁과 집단 농장 시스템 같은 사회주의적 좌파 정책들을 실행에 옮깁니다. 그리고 친위 쿠데타 가능성이 있는 군부를 장악하기 위해 왕정파 장성들을 대거 옷을 벗깁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사데그의 정책적 조치들은 당시 왕을 중심으로 한 기득권 그룹과 이란 판(版) 하나회라고 할 수 있는 일단의 정치 군인들을 결집시키는 효과도 가져옵니다. 민중적 인기와 종교 지도자들의 지지 때문에 모사데그를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공격하지는 못하지만, 대신 그들은 영국과 미국의 첩보 기관들과 은밀하게 접촉하며 쿠데타 음모를 키워갑니다.
한편 처칠은 미국을 설득하기 시작합니다. 모사데그를 그냥 두면 이란은 스탈린이 집어 먹게 된다는 것이 공작의 명분이고 전반부였다면, 미국 메이저들에게 이란 석유 이권을 당근으로 은밀하게 거래한 것은 미국의 동조를 이끌어 낸 공작의 실체입니다. 그 담합 내용은 정권 전복 비밀 작전이 성공한 뒤, 1954년 팔레비 이란이 앵글로 이란 석유 회사를 컨소시움 형태로 바꾸면서 적나라하게 밝혀집니다.
그때까지 영국이 독점해 온 AIOC 이권의 40%를 미국 5개 메이저에게 각각 8%씩 나누어줍니다. 나머지는 브리티시 페트롤리움(British Petroleum)이 40%, 쉘이 14% 그리고 프랑스의 CFP가 6%를 갖습니다. 사이 좋게 말입니다. 쉘은 거의 영국 자본이었으며, 프랑스 국영 석유는 떠들지 말아 달라는 조건으로 불로 소득을 챙긴 것입니다. 부연하면, 영국과 미국이 공개적으로는 이란 정책 노선을 비난하는 와중에도 그들은 제각기 이란 정권과 석유 이권 막후 협상을 시도했습니다.
에이잭스 공작의 요체
이 작전은 영국 MI6가 미국 CIA에 모사데그 정권의 전복을 위한 협조를 구하는 것으로 시작되었으며, 1953년 4월 당시 CIA 국장 알렌 델레스가 작전 예산을 승인하며 수단 방법 가리지 말고 모사데그를 축출하라고 지시함에 따라 실행됩니다. MI6와 CIA에 의해 수립된 작전의 수행은 당시 CIA 근동/아프리카 과장이었던 테오도르 루즈벨트 대통령의 손자 커밋 루즈벨트 주니어(Kermit Roosevelt Jr.)가 테헤란으로 날아 와 직접 지휘합니다.
크게 보아 이 작전은 3가지 세부 계획과 한 가지 비상대책을 기초로 진행되었습니다. 첫째는 이란 왕 팔레비에게 얼마 전에 그가 그랬던 것처럼, 모사데그의 권한을 회수하고 해임하라는 설득인데, 정치상황의 전개를 주시하던 왕은 처음에 그들의 말을 고분고분 수긍하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곧 설득되어 쿠데타 공작의 일익을 담당한 작전 요원처럼 움직이게 됩니다. 디-데이 직전엔 CIA 권고를 따라 로마로 일시 피신까지 합니다.
작전의 둘째 가닥은 왕을 지지하는 이란 민중과 모사데그의 정책 노선을 지지하는 민중을 교묘하게 이간하고 충돌시키는 것입니다. CIA의 교묘하고 대담한 마타도어 공작으로, 모사데그는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권력 중독자라는 모략적 공격을 당하게 되며, 그 결과 이란 전역에서 군주제 찬성파와 반대파가 충돌하는 총체적 혼란이 일어납니다. 상황이 이렇게 조성되자, 반대파들은 더욱 치열한 혼란을 조장하여 군부 쿠데타의 상황적 타당성을 조작해 나갔습니다.
작전은 계획대로, 모사데그 노선에 불만을 품은 왕정파 군인들이 탱크를 앞세워 권력을 장악하고 모사데그를 체포하는 것으로 대미를 장식합니다. CIA는 일주일 만에 샤 팔레비를 불러 다시 자리에 앉힙니다. 그 후 1979년 이슬람 혁명에 의해 축출될 때까지 26년간, 이 이란 왕은 철저한 친미노선과 악명 높은 비밀경찰 SAVAK을 앞세운 공포 철권 통치를 실시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미국 CIA는 그의 독재를 후원하고 지원하는 후견인이었습니다.
쿠데타 이전에 이미 국민투표를 통해 의회 해산권을 확보한 모사데그는 원한다면 공화정을 선포하고 대통령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며 시간을 보내다 체포되었습니다. 자신을 권력욕에 사로잡힌 잠재적 독재자로 몰아 가는 상황에서 설사 공화정을 원했다 해도 말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하여튼 그렇게 체포된 그는 반역죄 혐의로 재판을 받고 3년을 감옥에서 보냅니다. 그 후, 1969년 죽을 때까지 그는 가택연금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렇게, CIA가 디자인하고 성공시킨 쿠데타는 처음부터 결코 이념이나 이념적 블록의 대립에 기인한 것이 아닙니다. 민주나 인권이 동기가 아닌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단지, 힘을 바탕으로 강탈한 이란 석유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영국과 그것을 나눠 먹고 싶어 하는 미국이 그들의 욕심을 이념과 인권으로 호도했을 뿐입니다. 이런 일이 비단 이란에서만 또는 1953년에만 일어났던 일은 아닙니다.
과테말라, 쿠바, 그리고 칠레의 경우도 대동소이한 것입니다. 70년대 발표된 처치 보고서나 피노체트의 행적을 검토하면, CIA가 아옌데를 살해한 근본 동기가 인권이나 민주주의를 위한 것이 아님은 이제 미국조차 인정하는 사실입니다. 1953년 이후 26년간, 팔레비 통치가 얼마나 비민주적이고 반인권적 이었으며, 이란의 정체성이나 민족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는지는 생략해도 좋을 것입니다.
이러한 이란의 비극적 역사를 통해 오늘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할 것인지요?
힘을 앞세운 제국주의가 악이며 그것과 용감하게 맞서 싸웠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와 정열이지만, 보다 본질적이고 중요한 질문은 어떻게 무엇으로 얼마나 잘 준비하여 맞서 싸웠는가 하는 점입니다. 1951~1953년의 이란 종교 지도자들과 좌파 민족주의자들은 어리석게 행동했습니다. 순수한 신앙적 신념이나 민족주의적 이념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전술, 전략적 대응과 투쟁방식이 지나치게 성급하고 무모했으며 결국 어리석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결과론적 역사비평이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추구했던 것과 정반대의 너무나 동떨어진 결과와 민중의 질곡을 불러 온 그들의 정열과 희생이 모두 정당화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냉정하게 보아도 현실적 힘의 존재를 과소평가한 어리석음의 결과이며, 혹평한다면 종교적 신념과 사회적 이념을 과도하게 확신하고 벌인 싸움의 당연한 결과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50년 전 이란 종교 지도자,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이념에 경도된 민족주의 좌파 세력, 그리고 닥터 모사데그와 같은 현실 정치인의 사상적 정당성이나 인간적 정의감과 정열을 폄하하려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과도하게 서두르고 무모하게 전투를 전개한 그들의 현실적 오류와 서투름에 그들의 신념과 정열만큼 오만과 어리석음의 성분이 존재했다는 지적입니다.
혁명이든 개혁이든 성공하면 성공한대로 일정한 열매와 함께 부작용과 시행착오가 따르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실패할 경우, 그 대가는 종종 그러한 시도 자체의 정당성을 물어야 할 정도로 엄청난 피해와 반동을 초래합니다. 그러한 피해와 반동의 희생자가 결국 그들이 구원하고자 했던 민중이라는 것을 유념한다면, 혁명과 개혁은 순수성과 정열만으로 타당화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도덕적 순수와 인간적 정열만큼, 아니 그 이상 치밀하고 냉정한 전술 전략적 준비가 없다면, 성공해도 운이 따랐을 뿐이며 실패한다면 위험하고 값비싼 비용을 지불한 불장난이 되는 것입니다.
이란의 1953년은 우리 나라의 4.19와 유사한 역사적 이벤트입니다. 그것은 각각 이란과 한국의 역사적 평가 대상이며, 긍정과 부정의 요소가 모두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란의 1953년은 26년 팔레비 압정과 그 후의 전쟁과 강화된 신정정치에 이어지는 역사적 변곡점입니다. 한국의 4.19는 그 후 박정희 18년 개발 독재와 하나회 군부 쿠데타, 전두환의 광주 학살과 독재 그리고 또 다른 민주 항쟁으로 이어지는 역사적 변곡점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오늘 참여정부의 개혁을 지지하는 국민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은, 절대 서두르거나 오만에 빠지지 말아야 하며 현실적 힘의 존재를 과소평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잠시 중간 휴식을 갖기로 하겠습니다. 2시간 후에 11-2가 계속됩니다.